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고 이병철·정주영 회장의 성공 비결 철저한 준비는 불가능을 가능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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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군이 폴란드 서쪽 국경을 침공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이었다. 당시 폴란드 군인들은 사기가 충천해 있었다. 마음속에는 조국을 지키겠다는 뜨거운 일념만이 있을 뿐이었다. 사령관의 진격 신호와 함께 폴란드의 보병과 기병들은 적진을 향해 두려움 없이 달려나갔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백병전을 벌이려 했던 폴란드 보병, 기병들과는 달리 독일군은 기관총과 탱크로 무장한 신식 군대였다. 용기와 기세로만 상대하기에는 화력의 차이가 너무 컸다.

당연히 결과는 폴란드군의 대참패였다. 폴란드는 시대가 변하는 것도 모르고 무방비로 지내다가 철저하게 준비된 나치 독일군에게 힘 한번 못 써보고 나라를 빼앗겼다.

이 같은 현상은 전쟁에만 국한되어 일어나지 않는다. ‘철저한 준비’는 현대 기업의 운명에도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삼성전자의 반도체 사업 진출 비화가 좋은 예이다. 1969년 설립된 삼성전자는 사실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반도체 생산과는 거의 무관한 기업이었다. 삼성전자가 반도체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건 1977년 파산한 한국반도체
를 인수하면서부터였다.

당시 삼성전자의 반도체 사업 진출은 안팎으로 격렬한 반대에 부딪히고 있었다. 임직원들조차 대부분 반대할 정도였다. 지금은 고(故) 이병철 회장의 ‘신의 한 수’로 평가받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리스크가 큰 반도체 사업 진출로 삼성전자가 곧 망할 것이란 흉흉한 소문마저 나돌았다. 급기야 삼성전자의 주가가 곤두박질치기까지 했다.

해외에서의 평가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일본의 한 연구소에선 ‘삼성이 반도체 분야에서 성공할 수 없는 다섯 가지 이유’라는 보고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다른 글로벌 투자사들의 보고서에서도 ‘기술도 없는 조그만 기업이 경영자의 욕심 때문에 무모한 사업을 시작했다’는 평가가 주를 이뤘다. 삼성전자가 망하는 건 기정사실처럼 보였다.

만약 삼성전자가 당시 시장의 예상과 같이 반도체 사업에서 실패했었더라면 아찔한 상황이 벌어졌을 것이다. 삼성전자라는 이름은 이미 오래전 없어졌을 것이고 우리나라의 경제 수준도 최소 10년에서 20년 정도 후퇴했을 가능성이 높다. 대학에선 삼성전자의 반도체 시장 진출을 ‘경영자의 무모한 사업추진 실패 사례’로 가르치고 있었을 것이다.

물론 현실에서 삼성전자는 반도체 사업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당시 난다 긴다 하는 해외 유명 경제연구소들이 대부분 실패를 전망했음에도 보란 듯이 그 예상을 깨버렸다. 그렇다면 이 성공은 운이었을까? 이 성공을 단순히 삼성전자가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

당시 반도체 사업 진출을 책임지고 추진한 사람은 현재 삼성그룹의 최고 의사결정권자인 이건희 회장이었다. 이건희 회장은 1970년대 대부분 시간을 반도체를 공부하는 데 쓰고 있었다. 당시 그는 주로 일본에 체류하면서 반도체 기술자들을 만나 반도체 공정을 이해하는 데 특히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미국 실리콘밸리도 수시로 드나들었다. 반도체 수요 업체들을 찾아가 반도체 산업 현황이나 미래 전망을 수시로 체크하고 업데이트했다. 놀랍도록 치밀하게 준비한 셈이었다.

이병철 회장은 이렇게 최측근인 자기 아들에게 몇 년에 걸쳐 반도체 사업을 준비시켰다. 그리고 결국 삼성전자의 반도체 사업 진출이라는 기업의 명운을 건 결단을 내렸다. 한국반도체를 인수한 1977년, 이미 삼성전자의 반도체 산업 이해도는 상당한 편이었다. 당시 세간에선 삼성전자의 반도체 사업 진출을 무모하다고 평가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는 얘기다.

이런 배경을 볼 때 삼성전자의 반도체 사업 성공은 단순히 운이 좋았던 게 아니라 철저한 준비를 통해 스스로 만든 것이라 볼 수 있다.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는 기업’이라는 삼성그룹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괜히 생긴 게 아니란 것이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사례도 귀감이 될 만하다. 정 회장은 유명한 일화들을 여럿 가지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건 영국에 조선소 건설을 위한 차관을 빌리러 갔을 때의 이야기이다.

영국 바클레이즈 은행 고위 임원과의 협상 테이블에서 정 회장은 ‘한국에 큰 배를 만들 능력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정 회장은 오백원짜리 지폐를 꺼내 앞면에 그려진 거북선을 보여주며 충분하다고 설득했다. 이미 500여 년 전에 세계 최초의 철갑선을 만들었던 나라이니 문제가 없다는 논리였다. 정 회장은 이를 계기로 영국 바클레이즈 은행으로부터 무려 4,000만 달러라는 거액의 차관을 약속받았다. 그리고 정 회장은 이 차관으로 오늘날 세계 최고의 조선사로 꼽히는 현대중공업을 만들었다.

이 일화는 끊임없는 도전정신과 임기응변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좋은 예로 많이 회자되고 있다. 최근 1,0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영화 ‘국제시장’에도 상징적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이 일화가 삽입됐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자. 정주영 회장의 이 일화를 곧이곧대로 믿어야 할까? 상대방의 기지 넘치는 답변에 혹해 차관을 약속하는 대출담당 은행 임원이 과연 있겠는가? 그것도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도 불가능한 이야기일 뿐인데? 그것도 어마어마한 액수를? 정 회장이 당시 차관으로 약속받은 4,000만 달러를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거의 40억 달러에 이른다. 조금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불가능한 이야기란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바클레이즈 임원의 마음을 움직였을까? 정 회장의 이 기상천외한 답변에 바클레이즈 임원은 그를 비범한 사람이라 여기고 여러 가지 개인적인 질문을 하게 되는데, 그중 전공이 무엇이냐는 질문이 포함돼 있었다. 최종 학력이 초등학교인 정 회장으로선 경영 전문성을 증명할 수 없어 자칫하면 궁지에 몰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번에도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해 “내 사업계획서를 보았는가?”라며 “그 사업계획서가 내 전공”이라고 받아쳤다.

바로 여기에 비밀의 열쇠가 숨어 있다. 정 회장의 협상 테이블 최종 목적은 원래대로라면 제대로 한번 읽어보지도 않고 보류 결정을 내렸을 자신의 사업 계획서를 바클레이즈 측에서 읽게 만드는 것이었다. 실제로 바클레이즈 은행의 4,000만 달러 차관 결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건 정 회장이 가져온 사업계획서였다. 물론 정 회장은 바클레이즈를 설득할 수 있는 충분한 사업계획서 내용을 치밀하게 준비했었다. 정 회장의 4,000만 달러 차관 성공은 찰나의 기지 외에도 철저한 준비가 바탕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정 회장의 이 일화는 종종 기업에서 왜곡되어 사용되기도 한다. 끊임없는 도전과 임기응변만 있으면 모든 게 가능할 것처럼, 직원들에게 ‘너희도 무에서 유를 만들라’고 주문하는 식이다. 경영자가 정 회장의 일화를 피상적으로만 이해한 탓에, ‘열정과 용기만으로 이루어지는 성공은 극히 드물다’는 걸 깨닫지 못한 것이다. 다시 말해 철저한 준비가 이병철 회장과 정주영 회장의 성공 열쇠였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것이다.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대니얼 카너먼 Daniel Kahneman 미국 프린스턴대학 심리학과 교수는 이런 경영자들에게 일침을 날린다. 그는 ‘직관으로 성공했다는 사례 중 다수는 그냥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꼬집는다. 꽤 극단적인 이야기이지만, 그만큼 과학적 분석과 철저한 준비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글로벌 사회가 되면서 기업 간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기업의 경영을 들여다보는 입장에서 무한경쟁시대가 도래했음을 체감하고 있다. 한순간 마음을 놓으면 순식간에 뒤처지고 마는 것이 요즘의 세태다. 그렇기에 기업은 항상 준비해야 하고 또 준비돼 있어야 한다. 이병철·정주영 회장의 성공 이면에 산처럼 자리 잡고 있던 ‘철저한 준비’는 오늘날의 경영자들이 다시 한 번 필요성을 절감해야 할 주요 경영 키워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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