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이운형 전 세아그룹 회장은 국립오페라단 이사장을 역임할 만큼 국내 오페라 저변 확대에 남다른 애정을 쏟았다. 그의 뜻은 이운형문화재단을 통해 계승되고 있다. 특히 이 회장의 부인인 박의숙 세아홀딩스 부회장 겸 세아네트웍스 회장이 직접 재단 이사장을 맡아 문화예술 후원 사업을 진두지휘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크다. 남편의 유지(遺志)를 계승·발전시켜 나가고 있는 박의숙 이사장을 만났다.
김윤현 기자 unyon@hmgp.co.kr
사진 차병선 기자 acha@hmgp.co.kr
지난 3월 18일 온종일 흩뿌리던 봄비가 그친 저녁 8시 무렵 서울 서초동에 위치한 예술의전당. 이곳 오페라극장에서는 '제1회 이운형문화재단 음악회-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오페라 버킷(Opera Bucket)'의 막이 올랐다. 오페라극장을 가득 채운 관객 수만 1,800여 명에 달할 만큼 공연은 큰 성황을 이뤘다.
이운형문화재단은 고(故) 이운형 전 세아그룹 회장의 문화예술에 대한 애정과 열정을 계승하기 위해 설립된 재단이다. 이운형 회장은 지난 2000년 국립극장에서 독립한 국립오페라단의 초대 이사장을 맡은 이래 한국 오페라계의 발전과 저변 확대를 위해 아낌없는 후원 활동을 펼쳤던 주인공이다. 그는 항상 미소 띤 얼굴에 겸손한 인품으로 '재계의 신사'로 불렸다. 국립오페라단 이사장을 맡고 나서는 '오페라 전도사'라는 또 다른 애칭을 얻기도 했다. 그만큼 한국 오페라 발전을 위해 쏟은 정성과 사랑이 남달랐다.
제1회 이운형문화재단 음악회는 이운형 회장이 생전에 애호하고후원했던 작품인 '피가로의 결혼', 팔스타프' 등을 비롯해 일반인들이 편하게 감상할 수 있는 아름다운 선율의 곡들로 프로그램을 짰다. 특히 이 회장과 깊은 교감을 나눴던 이소영 전 국립오페라단 단장과 김주현 전 국립오페라단 상임지휘자가 각각 연출과 지휘를 맡는 한편 소프라노 박혜상 씨, 테너 김승직 씨 등 이운형문화재단이 후원하는 젊은 성악가들이 무대에 올라 의미를 더했다. 세계적인 음악가 사무엘 윤, 베시 혼 등도 함께 출연했다. 또한 세아그룹 임직원 48명으로 구성된 '세아 합창단'이 마지막 곡을 장식하면서 큰 박수갈채를 받았다.
음악회가 끝난 후 커튼콜을 받은 출연진이 무대 인사를 할 때도 매우 인상적인 장면이 연출됐다. 이 회장의 부인인 박의숙 이운형문화재단 이사장이 직접 무대에 등장한 것이다. 박 이사장은 환한 얼굴로 출연진 15명에게 일일이 꽃다발을 안겨주며 고마움을 표한 후, 그들과 함께 관객을 향해 허리 숙여 인사를 했다. 그 순간 장내는 뜨거운 환호로 뒤덮였다.
박의숙 이사장의 말이다. "제가 직접 꽃다발 디자인에 관해 플로리스트와 상의했어요. 예술가들은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감성적이기 때문에 정성을 담은 꽃다발 하나에도 뭉클해하죠. 그래서 디테일한 부분까지 신경을 썼어요. 저도 가끔은 섬세해질 때도 있답니다.(웃음)."
오페라는 음악, 연극, 미술, 무용 등 다양한 요소가 하나의 작품 안에서 조화를 이루는 종합 무대예술이다. 출연자들이 노래와 연기를 하기 때문에 음악극의 성격이 강하지만, 무대장치나 의상 등 미술적 요소도 작품의 완성도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구실을 한다.
제1회 이운형문화재단 음악회는 미술적 요소에서 참신한 시도를 했다. 첨단 디지털 영상을 폭넓게 활용해 무대장치를 대신한 것이다. 무대 뒤쪽 벽면에 투사된 다채로운 디지털 영상들은 작품의 주제와 분위기를 살리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는 평이다.
남편 뜻 계승해 '오페라 전도사' 나서
박의숙 이사장은 말한다. "남편이 생전에 좋아했던 애호곡을 비롯해 화려하지는 않지만 감동적인 작품을 주로 선택했어요. 또 무대장치 대신 디지털 영상을 활용해 신비로운 분위기를 만들었죠. 관객들께서 다들 '특별했다', '그런 갈라콘서트(Gala Concert: 오페라 작품의 주요 장면을 부분적으로 상연하는 약식 공연)는 처음 경험했다', '오페라를 이렇게 공연할 수도 있구나' 하는 말씀들을 많이 하시더군요. 저도 처음 공연 콘셉트를 잡을 때 아이디어를 좀 제공했어요. 대중성을 가미해 오페라를 쉽게 감상할 수 있도록 하자고 제안했죠. 저희 재단의 주요 목표 중 하나가 오페라의 저변 확대이기도 합니다."
고 이운형 회장은 지난 2000년 국립오페라단 초대 이사장을 맡아 국립오페라단의 자립 기반 마련에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국립오페라단 후원회를 조직해 많은 기업의 관심과 지원을 이끌어낸 것은 큰 업적으로 꼽힌다. "이제 당신만 오페라를 알게 된다면 모든 사람이 오페라를 사랑하게 되는 겁니다." 이운형 회장이 생전에 지인들을 만날 때마다 오페라 CD를 건네면서 한 말이다. 그런 애정과 정성 덕분에 '오페라 전도사'라는 별명도 자연스레 얻었다.
박의숙 이사장이 가장 좋아하는 오페라 작품은 이탈리아 작곡가 주세페 베르디의 대표작인 '라 트라비아타'다. '라 트라비아타'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오페라 걸작 중 하나다. 박 이사장은 대학 시절 전축으로 '라 트라비아타'를 처음 접했다고 한다. 그때 '라 트라비아타' 특유의 아름다운 아리아(Aria: 오페라 등에 나오는 선율적인 독창 부분)에 매혹돼 아직도 주저 없이 첫 번째 애호 작품으로 꼽는다.
하지만 박의숙 이사장이 애초부터 오페라 애호가였던 것은 아니다. 남편인 고 이운형 회장이 국립오페라단 이사장을 맡은 이후 부부가 함께 오페라 관람을 자주 다니면서 오페라의 매력에 서서히 빠져들었다고 한다.
박 이사장은 말한다. "저도 처음에는 오페라 공연장에서 하품도 하고 졸기도 했어요(웃음). 그러다 차츰 오페라를 공부하면서 제대로 감상할 수 있게 됐지요. 사실 남편이 오페라 전도사 역할을 한 덕분에 저도 오페라를 좋아하게 된 셈이에요. 제가 남편이 했던 역할을 이어받아 오페라 애호가들이 더 늘어난다면 그것 자체로 보람이 되겠죠."
사내 예술강좌 '레츠고 오페라' 직접 맡아
박의숙 이사장은 2013년 7월부터 세아그룹 임직원을 위해 마련한 '오페라 특강'에 직접 강사로 나서고 있다. 이 특강의 제목은 '레츠고 오페라(Let's Go Opera)'. 박 이사장이 손수 지은 제목이다. 임직원 모두가오페라를 제대로 배우고 즐기자는 취지에서 기획한 사내 문화예술 프로그램이다.
'레츠고 오페라'는 매회 특정 오페라 작품을 주제로 창작 배경, 예술적 특징 등을 전반적으로 소개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참석자들이 직접 해당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갈라 콘서트를 곁들이기도 한다. 박 이사장은 첫 번째 강연에서 자신이 가장 애호하는 작품인 '라 트라비아타'를 주제로 삼았다. '라 트라비아타' 강연은 참석자들의 '앙코르'를 받아 3차례나 개최됐다고 한다.
박 이사장은 대학 시절 불문학을 전공했다. 오랫동안 회사 경영에도 관여해왔다. 물론 오페라가 자신의 전문 분야도 아니다. 그럼에도 고 이운형 회장이 뿌린 오페라 사랑의 씨앗을 더욱 꽃피우기 위해 직접 소매를 걷어붙였다. '레츠고 오페라' 강연은 두세 달에 한 번씩 열린다. 어떤 주제로 강연을 하려면 당연히 상당한 지식을 갖춰야 한다. 그 때문에 박 이사장은 매번 강연에 앞서 스스로 오페라 공부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제가 오페라를 좋아하지만 오페라 전문가는 아니죠. 하지만 회사임직원들이 함께 오페라를 재미있게 공부해보자는 생각에서 '레츠고 오페라' 프로그램을 시작하게 됐어요. 그런데 직접 강연을 하려면 제가 먼저 공부하고 준비해야 하잖아요. 그러다 보니 '레츠고 오페라'를 진행하면서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게다가 임직원들도 호응을 해줘 보람을 많이 느껴요. 특히 DVD를 구매해 오페라를 본다거나 직접 공연장을 찾아 오페라를 관람하는 직원들이 점차 많아져 무척 행복하답니다."
고 이운형 회장은 세아그룹 임직원들이 오페라와 친숙해질 수 있도록 오페라 관람 기회를 많이 제공했다. 오페라 공연 티켓을 대량으로 구매해 나눠주는 것은 물론 몸소 앞장서서 임직원들을 공연장으로 이끌기도 했다. 오너 경영자와 임직원 모두가 오페라를 통해 소통하고 공감하는 기업문화를 정착시킨 것이다. 그런 토양 위에서 박의숙 이사장은 세아그룹 임직원이 한층 높은 수준의 오페라 애호가가 될 수 있도록 '코치' 역할을 자청하고 나섰다.
통상적으로 어떤 기업이 중시하는 가치와 철학이 조직 구성원의 생각과 행동으로 완연히 나타날 때, 그것을 기업문화라고 지칭할 수 있다. 기업문화는 구성원을 하나로 묶어주는 '가치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세아그룹은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품격 있는 기업문화를 갖추고 있는 셈이다.
음악 통해 임직원 간 정서적 친밀감 커져
박의숙 이사장은 말한다. "세아그룹 임직원들은 회식 자리에서도 오페라를 화제로 이야기를 종종 나눕니다. 예전에는 주로 축구나 야구 등 스포츠 이야기를 많이들 했죠. 그에 비하면 대화 수준이 많이 높아진 거죠(웃음). 물론 오페라에 대한 지식이 생겼으니 대화를 나눌 수 있겠죠. 다른 기업에서 온 경력사원들은 이런 세아그룹의 문화를 접하고는 '참 새롭다'는 반응을 보입니다. 여느 기업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모습이라는 거죠. 세아그룹 임직원들은 음악을 통해 정서적으로 강한 친밀감을 갖게 됐습니다. 특히 '우리 회사는 문화를 사랑하는 기업이다'라는 자부심도 강하죠. 물론 세아그룹보다 외형적 조건이 우수한 기업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 직원들은 회사에 다니면서 돈으로 따지기 어려운 가치를 느낍니다.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기업문화의 '보이지 않는 효과'인 셈이죠. 그게 결국은 임직원들의 자긍심과 사기를 높여 사업 성과로도 연결되는 겁니다."
이운형문화재단은 2013년 8월에 설립됐다. 그해 3월 해외출장 중에 갑작스레 타계한 이운형 회장의 뜻을 이어받아 한국 문화예술 발전에 이바지하자는 게 재단 설립 취지다.
이운형문화재단은 국내외에서 활동 중인 오페라 유망주가 세계적인 오페라 스타로 성장할 수 있도록 재정적 후원을 하는 한편 대학의 성악과 재학생을 대상으로 '영 아티스트(Young Artist)'를 선정해 후원하고 있다. 또 서울대 음악대학과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에 장학기금을 설립해 우수한 성악과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으며, 서울대 음악대학 교수들이 '음악 총서'를 발간할 수 있도록 학술연구비를 지원하고 있다. 아울러 지난 3월 개최된 제1회 이운형문화재단 음악회를 기점으로 크고 작은 음악회를 개최해나갈 예정이다.
박의숙 이사장은 말한다.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세아그룹의 기업 문화를 통해 세상을 아름답게(세아그룹의 회사명 세아는 '세상을 아름답게'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또 세상을 풍요롭게 하는 데 앞장서겠다는 게 저의 바람이자 이운형문화재단의 목표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