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의 성공학이 강조되면서 자주 인용되는 전 MBA 농구선수 마이클 조던의 얘기다. 선수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별생각 없이 내뱉은 얘기였을지도 모르지만 자신이 말한 실패(실수)가 과학적 사고와 사유의 유용한 도구라는 사실은 인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른바 '실수하기'는 스타 철학자이자 과학에 숱한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유명한 대니얼 데닛이 저서 '직관펌프: 생각을 열다'를 통해 제시한 77가지 생각도구 가운데 첫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실수하기가 과학적 사고의 첫 번째 생각도구라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대닛의 얘기를 들어보자. GPS가 없던 시절 항해사들은 망망대해에서 목적지를 찾아가려면 먼저 자신의 위치를 파악(추측)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래서 자신의 위도와 경도를 나름 정확하게 파악했다. 이때 조금 오차가 생겨도 상관없었다. 계산을 몇 번 더 하면 오차를 파악해 수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대닛이 중요하게 여긴 것이 바로 '정확하게 실수하기'다. 실수는 그 실수를 고치는 것이 의미 있을 만큼 저질러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좋은 실수를 저지르는 핵심은 실수를 감추지 않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의 시각에서 과학자는 실수하지 않아야 성공하는 마술사와 달리 실수해야만 성공하는 사람이다. 마술사는 실수를 감추지만 과학자는 실수를 드러내며, 정확한 실수를 많이 할수록 정확한 실험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래서인지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이자 현대물리학 개척자로 불리는 볼프강 파울리 박사는 동료의 연구 결과를 폄하할 때 "심지어 틀리지도 못했다"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지구를 대표해 외계인과 맞설 사람
인공지능(AI) 분야의 구루인 MIT의 마빈 민스키 박사는 데닛을 '지구를 대표해 외국인과 맞설 단 한사람'이라고 묘사했다. 또한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인 옥스퍼드대학 리처드 도킨스 교수는 데닛이 고안한 77가지 직관펌프를 놓고 '머리를 단단한 망치로 맞은 듯 놀랄만한 자극제'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다소 과장된 표현이지만 데닛은 충분히 그런 과찬을 들을 만한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사고 영역을 철학에서 진화생물학, 인지과학, 신경과학, 컴퓨터과학으로 확대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사고의 영역을 확대할 수 있는 생각도구, 즉 '직관펌프'를 고안해 무장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는 이 직관펌프를 어디에, 어떻게 사용해야 효과적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직관펌프: 생각을 열다'는 바로 그 비법을 전수해주는 책이다. '대니얼 데닛의 77가지 생각도구'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데닛의 생각도구를 따라하는 것이며, 가장 큰 소득은 직관펌프로 명명된 생각도구를 맛볼 수 있다는 것이다. 책 전체를 관통하는 과학적 지식도 훌륭한 덤이다.
우리는 도구 없이 살 수 없다. 태초에 손과 발이라는 도구가 있었고, 먼 옛날 사냥을 하고 집을 지을 때도 도구를 사용했다, 지금도 첨단 과학의 산물로 만들어진 무수한 도구들을 사용한다.
이 점에서 인류 문명의 발전은 맨눈으로는 볼 수 없는 미세한 세계에서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우주라는 거대한 세계까지 도구를 이용해 하나씩 정복해나가는 과정이라고 표 현해도 실언은 아니다.
쓰레기에서 시간 낭비하지 말기
이렇게 도구를 이용해 삶의 영역을 넓혀온 것처럼 우리는 생각도구를 통해 사고와 인식의 영역을 확장할 수 있다는 게 저자의 판단이다. 그렇다면 가장 뛰어난 생각도구는 뭘까.
일견 '수학'이 떠오를 수 있겠지만 데닛은 이런 유형의 도구는 직관펌프를 구성하는 중요한 생각도구로 보지 않는다. 그보다는 의미와 의식, 자유의지, 진화에 기반한 행위들을 중요시 한다. 실수하기, 비판적으로 논평하기, 쓰레기에 시간낭비 하지 말기, 일반인 청중을 미끼로 쓰기, 심오한 함정 조심하기 등이 그것이다. 개중에는 역사를 뒤바꾼 철학자나 과학자들이 애용했던 생각 도구도 포함돼 있지만 방점이 찍혀 있는 것은 저자 자신이 직접 갈고닦아 문제 해결에 사용했던 도구들이다.
예를 들어 그는 '비판적으로 논평하기'를 실수하기에 더해 과학적 사고와 논쟁에서 아주 유용한 생각도구로 꼽았다. 상대방의 이론이나 견해의 모순을 지적하되 품격 있는 논쟁과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을 수 있는 방법론이다. 상대방의 입장을 명확하고 생생하게 재언급한다, 의견이 일하는 지점을 모두 나열한다, 상대방에게 배운 것을 모두 언급한다, 그리고 나서 반박하고 비판한다 등 총 4단계로 이뤄져 있다.
'쓰레기에 시간을 낭비하지 말기'도 흥미롭다. 이는 "과학소설의 90%는 쓰레기다. 하지만 모든 것의 90%는 쓰레기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쓰레기가 아닌 나머지 10%다"고 말한 과학소설가 테드 스터전의 연설에서 착안했다. 데닛은 여기서 좀더 나아갔다. '‘분자생물학 실험의 90%, 시의 90%, 학술지에 게재된 수학 논문의 90%, 그 밖의 모든 것의 90%는 똥'이라고 말한다.
어쨌든 이 도구의 쓰임새는 명료하다. 소중한 시간과 인내심을 허비하지 않기 위해 우리가 찾을 수 있는 최고의 연구 성과와 최고의 논문, 최고의 작품에 집중하라는 것이다. 90%에 매달리면 상대를 희화화하고 조롱하고 트집 잡을 수밖에 없는데 이것은 과학적 사고와 사유의 가장 큰 적이자 시간 낭비에 불과하다는 설명이다.
범용도구와 분야별 도구
데닛은 이 같은 범용 생각도구를 12가지 제시한다. 어떤 분야든 어디에서든 구애받지 않고 폭넓게 사용할 수 있는 생각도구다. 비교적 간단하지만 과학적 사고와 논쟁이라는 전투에서 살아남고 이길 수 있도록 해주는 도구라 할 수 있다.
나머지 55가지 생각도구들은 의미와 진화, 의지, 자유의지 등 주제에 따라 분류했다. 범용도구에 비해 복잡하거나 특화된 분야의 전투에 임할 수 있는 맞춤형 도구다. 사용 범위는 좁지만 더욱 예리하다.
물론 직관펌프는 일상생활을 영위하는데 있어 꼭 필요한 존재는 아니다. 어쩌면 과학적 사고나 행위에 별로 유용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책 말미에 적힌 대닛의 얘기에 조금이라도 귀를 기울인다면 왜 그가 그토록 자신만의 생각도구, 즉 직관펌프를 강조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우리는 물질적 세계에서 의미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지, 생명이 어떻게 생겨나고 진화했는지, 의식은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리고 자유의지가 우리의 타고난 재능일 수 있는지를 온전히 상상하는 일에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발전은 있었다. 지금 제기하고 다루는 질문은 예전의 질문보다 나아졌다. 답이 코앞에 있다."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은 '지구 최고의 지식 요리사'가 지난 반세기 동안 지적 난제들과 싸워서 쟁취한 '지식 레시피'를 손쉽게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물질에 불과한 뇌에서 어떻게 의식이 생성될 수 있을까, 자유의지는 존재할까, 의식을 가진 기계의 개발은 가능할까, 과학과 종교는 양립할 수 있을까 같은 난제들 말이다.
데닛의 직관펌프를 따라가다 보면 현미경이나 망원경 역할을 하는 생각도구도 힘들이지 않고 얻을 수 있다. 그렇다고 쾌재를 부르기는 이르다. 책은 두껍고, 과학적 사고를 필요로 하는 기초 문제가 곳곳에 지뢰처럼 숨어 있다. 부록으로 문제풀이가 실려 있지만 풀이를 읽어봐도 선뜻 이해가 어려운 문제들이 있다. 그러나 너무 빨리 포기하지는 말자. 답은 코앞에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