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촬영이나 사무실 공개는 불가합니다. 저희가 조금 까탈스러워요.” 색다른 경험이었다.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기자의 인터뷰 제안을 수락했다. 하지만 인터뷰는 사무실이 아닌 외부에서 해야 했다. 사무실 공개는 안 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더구나 사진 촬영도 꺼렸다. 인터뷰에 인물 사진을 실을 수 없다니! 온전히 텍스트로만 기사를 꾸며야 하는 난감한 상황이었다. 폭염이 절정에 달하던 지난 8월 초, 서울 강남 모처에서 정영준 문성욱 팀블라인드 공동대표를 만났다.
주고받은 명함에서부터 색다른 기운이 느껴졌다. 사무실 주소가 없었다. 이름, 직책, 이메일 주소, 휴대폰 번호가 전부였다. 불현듯인터뷰 준비 과정에서 느낀 당황스러움이 다시금 떠올랐다. 신비주의(?)를 고수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공동대표에게 물었다. “저희가 서비스하고 있는 블라인드의 핵심은 익명성입니다. 저희가 노출되면 익명성 보장이라는 블라인드 서비스 기조가 흔들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쉽게 말해 관리자가 모습을 드러내면 사용성을 저해할 수 있다는 거죠. 블라인드 개발자가 아닌 블라인드서비스 자체에 관심을 두게끔 노력하는 것이올바른 전략이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플랫폼 서비스에서 운영자들에게 관심 두는 사용자들이 얼마나 있을까요?(웃음)”
팀블라인드의 신비주의는 사내 직책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흔히 사용하는 대리, 과장, 부장은 이 회사에 존재하지 않는다. ‘잡스(Jobs)’가 팀블라인드의 유일무이한 직책이다. 실제로 정영준,문성욱 공동대표의 명함에도 각각 ‘텐 잡스(Ten Jobs)’ 와 ‘멀티플 잡스(Multiple Jobs)’라는 직책이 눈에 띄었다. 처음에는 혁신의 상징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Steve Jobs)에 대한 존경의 의미라 생각했다. 하지만 기자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여기서 잡스라는 직책의 의미는 이른바잡부’다. 적은 인원이 다양한 업무를 진행한다는 차원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제부터 정영준·문성욱 공동대표를 각각 정 잡스, 문 잡스로 기명한다)
이러한 신비주의는 가끔 엉뚱한 루머를 양산하기도 했다. 대형 IT기업에서 경쟁사 정보를 빼내기 위해 만든 비밀조직이라는 ‘기업 임원 사주설’에는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루머는 루머일 뿐이다. 정 잡스와 문 잡스 모두는 오롯이 창업이라는 꿈을 위해 뭉친 IT업계 능력자들이다.
네이버 출신의 두 공동 창업자
정 잡스와 문 잡스는 모두 NHN(현 네이버) 출신이다. 정 잡스는 NHN에 입사해 브랜드 마케팅과 고객 커뮤니케이션을 담당했다. 그리고 지난 2009년 여행 정보 사이트 ‘윙버스’가 NHN에 인수되면서 윙버스에 몸담고 있던 문잡스 역시 NHN에 합류한다. 각자 맡은 업무와 부서는 달랐지만 자주 마주치며 친한 동료가 됐다. 이후 그들은 소셜커머스 기업 티켓몬스터로 함께 이직하며 더욱 돈독해졌다. 약 7년간 함께 일하며 그들은 창업에 대한 꿈을 갖기 시작했다. 아이템도 쉽게 창출할 수 있었다. NHN 재직 당시의 경험 덕분이었다. 정 잡스는 말한다. “과거 NHN 근무 당시, 직원들이 가장 좋아했던 장소가 어디였는지 아세요? 바로 NHN 인트라넷에 존재했던 익명 게시판이 었어요. 익명이다 보니 공개석상에서 말하기 어려운 넋두리가 이어졌죠. 그 외에도 직장생활을 하면서 발생하는 소소한 재미도 함께 공유할 수 있었고요. 이처럼 익명성을 활용한 직장인들만의 커뮤니케이션 공간을 만든다면 충분히 성공 가능성이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본격적으로 개발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이후 두 명의 잡스는 2013년 12월, 본격적인 익명 SNS 개발에 착수한다. 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IT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엔지니어와 기획자들이 대거 합류했다. 그리고 불과 6개월 만에 폐쇄형 SNS ‘블라인드’가 탄생하게 된다.
블라인드는 가입자가 익명으로 커뮤니케이션을 진행하는 폐쇄형 SNS 애플리케이션 (이하 앱)이다. 개설 및 사용방식은 간단하다. 기업 내 직원이 블라인드 서비스 내 ‘오픈신청’버튼을 누르면 신청할 수 있다. 이후 일정 수준의 가입요청 수가 확보되면 개설이 완료된다. 개설된 블라인드에 가입하고자 하는 직원은 간단한 인증 절차를 거친 뒤 참여할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인증절차에 사용하는 메일이 반드시 회사에서 사용하는 기업 계정 메일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과연 블라인드를 처음 도입한 기업은 어디였을까? 주인공은 다름 아닌 잡스들의 친정 ‘네이버’였다. 정 잡스는 말한다. “자연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초기 사용자를 확보해야 하는데 익명 서비스라는 특성상 홍보나 마케팅은 최대한 자제할 수밖에 없었거든요.
자연스럽게 동료들이 많이 모여 있는 친정 네이버 동료들에게 저희 서비스를 알음알음 알렸죠. 다행스럽게도 반응이 꽤 괜찮았습니다. 그 후 입소문을 타면서 게임, 포털 등 IT 업계에서 저희 블라인드가 사용되기 시작했어요.” 입소문을 타기 시작한 블라인드는 직장인들 사이에서 조금씩 입지를 굳히기 시작했다.
창업 초기 6개에 불과했던 블라인드 가입 기업은 서비스 시작 1년이 조금 지난 2015년 8월 현재 540여 개에 이르고 있다. 현재 블라인드에는 2가지 그룹이 존재한다. 우선 각 회사내 직원들 간 소통이 가능한 ‘블라인드’ 그룹과 IT·금융·유통·조선 등 업종별 그룹인 ‘라운지’ 가 바로 그것이다. 현재 블라인드 서비스를 도입한 540여 개의 기업 외에 업종별 그룹 ‘라운지’도 약 40여 개가 개설돼 운영되고 있다.
기업·업종별 폐쇄형 직장인 SNS
특히 블라인드의 성장을 이끈 또 하나의 터닝포인트가 있었다. 이른바 ‘땅콩 회항’으로 알려진 대한항공 이슈였다. 블라인드 내 게시판에서 처음 알려진 ‘땅콩 회항’ 사건은 이후 거대한 사회적 이슈로 국내를 뜨겁게 달궜다.
문 잡스는 말한다. “대한항공 이슈는 분명 블라인드의 성장에 중요한 기폭제가 됐습니다. 하지만 부정적인 효과도 분명 있었어요. 업계와 기업 간 소통을 추구해왔던 블라인드가 어느 순간부터 기업 내 민감한 이슈를 찾아내려는 익명 게시판으로 불리게 됐다는 점이죠. 하지만 지금은 저희가 추구했던 소통의 공간으로 다시금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하면서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직원들 간의 거리낌 없는 대화는 해당 기업 임원이나 CEO에게는 민감한 사항일 수밖에 없다. 회사 차원의 항의나 압박이 들어올 법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잡스에게 물어봤다. 회사 차원의 항의가 없었을까? 돌아온 답은 ‘ 노( No)’ 였다. 정 잡스는 말한다. “저희는 플랫폼 사업자입니다. 저희는 어떠한 의도를 갖고 사업을 하지는 않아요. 기업에서도 이 같은 저희 서비스의 성격을 잘 알고 있습니다. 물론 간혹 건의사항이 들어오곤 합니다. 하지만 게시판 폐쇄나 삭제를 요구하는 문의는 아직 없었습니다. 오히려 기업 CEO가 직접 가입해 직원들의 고충을 듣고 이를 개선하는 데 활용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잘된일이죠.”
블라인드에서 이어지는 대화 대부분은 회사에 대한 애정 어린 불만(?)이다. 회사 환경에 대한 불만과 개선점, 건의사항, 월급에 대한 하소연이 이어진다. 직원뿐 아니라 경영진들도 블라인드에 주목하고 있다. 회사에 대한 불만을 적극적으로 경영전략에 반영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지난해 티켓몬스터 블라인드에는 ‘신현성 티켓몬스터 대표가 해마다 성장지표를 보여주는 것이 지겹다’라는 불만의 글이 쏟아졌다. 이후 신 대표는 신년사를 통해 “올해는 성장지표를 보여주지 않겠다”는 발언을 하며 블라인드를 보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내비쳤다. 또 실내공기가 탁하다는 블라인드 내하소연에 대해 공기청정기 도입을 지시했고, 커피 맛이 별로라는 글이 게재된 이후 자체 블라인드 테스트를 통해 맛 좋은 커피로 바꾼 사례도 있다.
블라인드의 또 다른 파급력은 새로운 직장인 문화를 탄생시켰다는 점이다. 가입자 간 소개팅에서 파생한 소개팅 애플리케이션 ‘블라인드듀오’가 대표적 사례다. 공감대 형성을 통해 지역, 연령대별 문화가 형성되면서 실제 만남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블라인드듀오를 통해 결혼에 골인한 가입자도 존재한다는 것이 두 잡스의 설명이다. 또 블라인드 가입자들이 실제 오프라인 공간에 모여 봉사활동을 펼치는 ‘블라인드 봉사단’ 역시 블라인드 서비스가 파생시킨 훈훈한 결과물이다.
이 같은 블라인드의 파급력은 비단 국내 시장에만 그치지 않는다. 의욕적으로 추진한 글로벌 시장 진출에서도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글로벌 비즈니스 네트워크 인맥 서비스 ‘링크트인 (Linked In)’과 거대 온라인·모바일 종합 쇼핑몰 ‘아마존(Amazon)’ 임직원들이 블라인드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미국에 본사 두고 글로벌 서비스
미국 시장에서의 성과는 치밀한 현지화 전략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정 잡스와 문 잡스는 팀블라인드 창업 초기부터 글로벌 시장을 염두에 뒀다. 이를 위해 본사를 미국 샌프란시스코 인근에 마련했다. 현재 한국 사무실은 연락사무소, 일본 사무실은 지사 개념으로 운영되고 있다. 처음부터 글로벌 서비스에 관심을 둔 이유는 무엇일까? 블라인드 서비스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이었을까?
“만약 블라인드가 한국에서만 통할 서비스였다면, 미국에 본사를 세워야겠다는 생각을 애당초 하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커뮤니케이션 서비스는 글로벌 서비스입니다. 소통에 대한 갈망은 국적이나 인종과 상관이 없죠. 솔직히 국내 직장인들이나 미국 직장인들이나 회사 생활은 비슷하잖아요. 충분히 해외에서 통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결정을 할 수 있었습니다.”
블라인드 서비스를 알아가면서 가장 궁금했던 부분은 역시 수익모델이었다.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매출을 일으킬 만한 부분을 찾을 수 없었다. 매출은 어디서 발생할까? 기자의 질문에 두 잡스 모두 ‘아직 수익모델은 없다’라고 잘라 말했다. “아직 수익모델을 논할 단계는 아니라고 봅니다. 외적 성장에는 분명 도움이 되겠지만, 서비스의 질적 성장에는 좋지 않죠. 사용자 참여비율을 높이고 서비스 완성도 개선에 집중해야 할 시점입니다. 물론 평생 수익을 안 낼 수는 없겠죠. 내년 초 부터 다양한 방식의 수익모델을 테스트할 예정입니다. 어떠한 방식이 될지는 저희도 아직 모르겠어요. 서비스 완성도에만 집중하기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거든요. (웃음)”
두 잡스와 대화했던 1시간 남짓 동안 그들의 열정을 오롯이 느낄 수 있었다. 당장 돈을 벌지 않아도 된다는 잡스들의 말이 결코 허언으로 들리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물었다.
정 잡스와 문 잡스, 그리고 블라인드가 추구하는 궁극적 목표는 무엇일까? 두 잡스는 모두 ‘편견 없는 소통’이 블라인드가 나아갈 방향이라고 강조했다. 두 잡스는 말한다. “익명서비스는 호불호가 분명합니다. 거리낌 없는 소통이 가능하지만, 근거 없는 비판이 난무할 수도 있죠. 하지만 블라인드에서는 ‘회사’, ‘업종’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소통하게 됩니다. 동질감으로 뭉친 직장인들은 익명성이라는 장점을 활용해 회사 발전, 나아가 산업발전에 대한 이야기를 자유롭게 할 수 있죠.
적어도 블라인드에서의 ‘익명성’은 편견 없는 소통을 이어갈 수 있는 최고의 장점입니다. 팀블라인드의 잡스들은 이러한 편견 없는 소통을 위해 더욱 더 서비스를 가다듬고 발전시켜 나갈 계획입니다.”
*‘대나무 숲’: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이야기로 잘 알려진 신라 경문왕 설화에 등장한다. 마음껏 속내를 드러낼 수 있는 공간이자 소통의 창구를 상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