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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보스니아 내전… 6자회담… 33년 외교인생을 말하다

'맥아더 이후 한국서 가장 유명한 미국인' 힐

■ 크리스토퍼 힐 회고록: 미국 외교의 최전선(크리스토퍼 힐 지음, 메디치 펴냄)

냉전~탈냉전 시대 어우르는 美 외교 이면 엿볼 수 있어

영변 핵시설 냉각탑 폭파 등 6자 회담 뒷이야기도 눈길

크리스토퍼 힐
2007년 7월 베이징으로 향하는 기내에서 천영우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과 대화 중인 힐.
/사진제공=메디치
크리스토퍼 힐 회고록

1985년 주한 미국 대사관 경제담당관, 2004년 주한 미국 대사, 2005년 6자회담 미국 수석대표. 한국과의 인연이 각별한 크리스토퍼 힐의 회고록이 출간됐다.

지난 1977년부터 2010년까지 총 33년간 외교관 생활을 하며 힐은 많은 일들을 해냈다. 냉전 이후 유고슬라비아가 분열되면서 생긴 보스니아 내전을 끝내기 위해 리처드 홀브룩 수석대표와 함께 데이턴 평화협상을 이끌어 내기도 하고, 코소보 내전을 해결하기 위해 코소보 민족해방군을 찾아가는 야전형 협상가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크리스토퍼 힐 회고록: 미국 외교의 최전선'은 힐의 외교관 생활의 총결산인 동시에, 냉전시대에서 탈냉전 글로벌 시대에 이르기까지 슈퍼파워 미국 외교의 초상이기도 하다.

수십년 외교관의 삶이 담긴 책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지만, 그의 책에는 한국과 관련된 내용이 많이 포함돼 더욱 더 관심을 갖고 읽을 만하다. 힐은 책을 통해 "한국과 관련된 내 활동 중 가장 중요한 임무는 서울을 떠나 국무부의 동아태 차관보 겸 6자회담 미국 수석대표가 되면서 시작됐다"고 말한다. 6자 회담 미국 수석대표를 맡은 이후 이뤄진 9·19공동성명, 2·13합의, 영변 핵시설 냉각탑 폭파까지. 이 모든 과정에 힐이 없었던 적은 없었다.

힐은 국무장관 취임을 앞둔 라이스로부터 동아시아태평양 차관보가 돼 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이를 수락하면서 "나는 6자회담 접근법의 강력한 옹호자인데, 그 틀 안에 북한과 기꺼이 마주 앉아 대화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차관보 자리를 수락한 그는 우선 당시 송민순 외교부 차관보와 만나 중국을 시작으로 해서 나머지 6자회담 수석대표와 회동할 날짜를 잡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북한의 의사였다. 힐은 2005년 6월 29일 야구 경기를 보던 중 전미외교정책협의회가 주최한 회의에 북한 대표단으로 참석한 리근과 통화를 하고 북한의 6자 회담 복귀 의사를 물었다. 리근은 힐이 베이징에서 김계관을 만나면 6자회담에 복귀한다고 말했고, 이에 힐은 베이징에서 김계관을 만났다.

그렇게 6자 회담은 이뤄졌고 9월 19일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는 대가로 북한의 안전을 보장하고 에너지를 지원한다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한다.

발표 한 시간 전 라이스 국무장관이 성명서 문구 중 북한과 미국의 '평화공존' 부분이 냉전시대의 낡은 용어라며 수정하자는 제안을 했다. 이렇게 평화공존(Peaceful Coexistence)이라는 표현은 평화롭게 함께 존재한다(Exist Peacefully Together)로 바뀌었다.

공동성명을 마련하기 위해 협상에 집중한 그 해 9월, 미국 재무부는 북한 당국을 위해 돈세탁을 한 혐의로 방코델타아시아(BDA)를 제재한다고 발표하면서 다시 한 번 위기가 찾아온다. 힐은 북한의 문제점을 인식하면서도 북한을 회담 자리로 끌어오기 위해선 BDA문제가 해결돼야 할 필요성을 끊임 없이 강조했고 결국 이 같은 노력으로 북한은 묶여 있던 돈을 받을 수 있게 됐다.

2007년 2월 13일 북한 핵시설 폐쇄에 관한 내용이 담긴 2·13합의가 발표되고, 2007년 7월 14일 북한은 2·13 합의의 첫단계 이행조치로 영변 플루토늄 원자로를 폐쇄하고 2008년 6월 27일엔 각국의 취재진이 참석한 가운데 영변 핵시설 냉각탑을 공개 폭파했다. 2만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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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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