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차기 정부, 이것만은 고치자] <7> 포퓰리즘에 희생되는 금융산업

표 잡으려다 금융질서 무너져… 퍼주기 정책 자제해야<br>가계부채·하우스푸어 대책 남발… 모럴해저드 키우고 형평성 문제<br>지나친 순익·수수료 문제있지만 금융권 때리기로 표심잡기 안돼




"우리 금융산업에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수준도 낮고요. 하지만 지금 진행되고 있는 '금융 포퓰리즘'은 금융회사에 대한 '분노'를 자극한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결국 금융개혁을 명분으로 지나친 규제와 간섭이 따라오게 되는 거 아니겠어요. 요즘 은행마다 내놓은 천편일률적인 가계부채 대책을 보노라면 마지못해 어쩔 수 없이 생색내기로 쥐어짰다는 느낌부터 먼저 듭니다."

익명을 요구한 민간 금융연구소 관계자는 대선 정국을 맞아 금융산업을 휩쓸고 있는 여론 몰이식 포퓰리즘에 쓴소리를 내뱉었다. 그는 "하우스푸어 대책을 비롯해 최근 봇물 터지듯 나오고 있는 각종 지원대책은 자기 책임의 원칙을 근간으로 하는 금융질서를 뿌리째 흔들 수 있다"고 비판했다.


실제로 최근 은행 등 금융회사들이 내놓고 있는 각종 서민금융 지원책들을 곰곰이 살펴보면 살림이 어려운 가계나 기업에 희망의 불씨를 살리는 수준을 넘어서는 경우가 적지 않다.

자칫 빚을 제때 안 갚고 버티면 채무를 탕감 받을 수 있다는 잘못된 인식과 모럴해저드를 조장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국가 경제의 뇌관이라는 가계부채 부담을 덜어 내수를 살리겠다는 명분으로 국가 재정이나 은행 자금을 활용해 하우스푸어를 구제하겠다는 대책은 대선 정국을 틈타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최근 박근혜 새나라당 대선 후보가 내놓은 '집 걱정 덜리 종합대책'의 경우 집 주인이 지분 일부를 공적 금융기관에 매각한 뒤 매각대금으로 대출금 일부를 갚고 매각지분만큼 임대료를 내도록 한다는 게 핵심이다. 원리금 상환 부담을 덜어주면서 집이 경매에 넘어가 길거리에 나앉게 되는 사태를 늦춰보겠다는 취지가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부동산 투자 실패나 손실을 공적기관이 나서서 메워준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결함이 있다. 이런 식의 접근은 도덕적 해이는 물론이거니와 무주택자 등과의 형평성 문제, 재정건전성 악화를 초래하는 등 부작용이 클 수밖에 없다.

한 시중은행 고위관계자는 "하우스푸어를 정부 돈으로 구제해주면 신용대출 연체자, 학자금대출 연체자 등이 '나도 나랏돈으로 도와달라'고 나설 텐데 어떻게 감당하느냐"며 "부동산 투기에 성공하지 못하면 나라가 집을 사주고 집값이 오를 때까지 들고 가겠다는 게 과연 정상적인 발상일 수 있느냐"고 지적했다.


이런 비판의 와중에서도 금융당국은 우리은행이 발표한 트러스트앤드리스백(신탁 후 임대, 집주인이 소유권은 유지하고 집을 관리ㆍ처분할 수 있는 권한은 은행에 넘긴 뒤 3~5년 신탁기간 동안 대출이자 대신 월세를 내는 방식)제도를 은행권 공동으로 추진하는 방안을 실시할 태세다. 이뿐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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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부실 저축은행의 예금자보호 한도를 늘리는 특별법안을 추진해 한바탕 분란을 일으킨 정치권은 최근 본격적인 대선 시즌을 맞아 저축은행 피해자구제대책반 설립을 금융당국에 압박하고 있다. 이런 일들은 불필요한 행정력 낭비를 초래할 뿐이라는 지적이 우세하다. 잇따라 봇물 터지듯 하고 있는 저신용자나 다중채무자에 대한 이자감면, 원금분할상환 등도 제도 시행의 선의와는 상관없이 모럴해저드를 양산하는 부작용을 낳을 공산이 더 크다. 등 떠밀려 무리한 지원책을 내놓게 되면 금융기관들은 다른 곳에서 부실을 메울 수밖에 없다. 금융회사에 대한 팔 비틀기식 지원책에 약발을 기대할 수 없는 이유다. 예컨대 카드사에 특정 단체가 떼쓰기에 가까운 집단행동을 통해 과도하게 가맹점 수수료를 낮추면 카드사들은 포인트 적립 혜택을 줄이게 되는 식이다.

얼마 전에는 부자증세라는 여론을 등에 업고 정부가 생명보험사의 즉시연금상품에 과세하기로 해 대다수 서민의 절세 통로가 막히는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다.

금융계의 한 고위인사는 "금융권의 탐욕 문제가 포퓰리즘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며 "지나친 순익과 수수료 체계 등 문제가 있는 것은 개선돼야겠지만 금융권 때리기로 표심을 잡으려는 움직임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냉정히 보면 포퓰리즘은 금융계가 자초한 측면도 없지 않다.

금융위기 이후 금융권이 리스크 관리에만 치중하면서 그 결과로 불합리한 가산금리체계 및 과도한 수수료 책정 등을 통해 부당한 이익창출에 몰두한 경향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이는 금융권 개혁의 목소리를 높이는 한 요인이 됐다. 과거 외환위기 당시 공적자금을 투입해 은행을 살린 원죄가 있는 점도 금융회사들이 여론의 표적이 되기 쉬운 환경이 됐다.

하지만 대선 정국을 틈타 마치 모든 탐욕과 문제의 근원이 금융회사인 양 이들을 달달 볶는 분위기는 바로잡아야 된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한 시중은행 부행장은 "당장은 내수를 살리기 위해 은행들에 가계부채 대책과 기업 지원 방안을 내놓으라고 하지만 은행의 이익이 악화되거나 부실이 생기면 그간 뭐했느냐고 달려 들 것"이라며 "그런 양면성을 인식하고 리스크 관리에 만전을 기하려 한다"고 말했다. 그는 "주식을 샀는데 손해를 봤을 경우 궁지에 빠진 투자자를 위해 증권사들이 대책을 내놓지 않는 것처럼 정치권이나 당국이 시장의 기본질서를 무너뜨리는 일을 꾀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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