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CEO 칼럼] 빛 좋은 개살구, 맛 좋은 살구


35년 전 사령장을 받고 막 서울 을지로지점에 배치 받은 시절을 떠올릴 때면 피식 웃어버리고 만다. 사법고시를 접고 은행원이 된 나는 뭐든 다 해낼 수 있을 것처럼 의욕이 넘쳤다. 하지만 선배들이 보기에는 그저 '빛 좋은 개살구'일뿐이었다. 선배들은 칭찬에는 인색했고 질책에는 관대했다. "당장 나가! 머리가 왜 그리 빳빳해! 대충대충 일할 거면 은행은 왜 들어왔어? 그게 은행원의 자세야?"연일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선배들의 질타에 변명조차 할 수 없었고 몸보다 마음이 힘든 나날의 연속이었다. '오늘 또 무엇 때문에 혼날까?'라는 생각으로 늘 마음을 졸여야 했다. 의욕은 늦가을의 나뭇잎처럼 힘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어리숙해 보여도 속은 꽉 채워야지


이때 난득호도(難得糊塗ㆍ직역하면 '총명한 사람이 어리숙해보이기란 어렵다'지만 '총명한 사람이라도 어리숙해보일 필요가 있다'는 의미로 쓰임)의 지혜가 떠올랐다. 한 걸음 물러서서 나를 살펴봤다. 융통성이 부족하고 선배들의 질책을 그저 잔소리로만 여기는 고지식한 사람일 뿐이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보냈다가는 긴장된 삶이 계속될 것 같았다. 부족한 것은 채우고 바꿔야 할 것은 바꾸기로 했다. 선배들의 질책에 집착하지 않고 어리숙해보이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몸을 낮추고 마음을 활짝 열고 여러 사람의 말을 귀담아들었다. 가끔 욕도 써가면서 딱딱한 이미지 대신 친근한 이미지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처음에는 그렇게 하는 것이 낯설고 힘들었지만 언젠가는 '겉은 어리숙하게 보여도 속은 꽉 찬 은행원'이 되리라는 믿음이 에너지였다. 그리고 '가득 찬 것은 절로 덜어지고 비어 있는 것은 점점 채워질 것'이라는 기대로 하루하루 나를 단련했다.

6개월쯤 지났을까. 퇴근 후 술자리에서 한 선배가 이런 말을 했다. "내가 남의 가슴속에 들어가는 거 참 힘든 거야. 요즘 네가 일하는 거 보니까 내 가슴속에 들어올 자격이 충분하다."


선배의 말에 감격한 나머지 한참을 서럽게 울었다. 누군가의 가슴속에 들어가기 위해 벙어리 냉가슴을 달랬던 시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대장부가 눈물을 흘린다고 선배에게 혼이 났지만 내심 기쁜 마음에 더 서럽게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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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눈물은 내가 '빛 좋은 개살구'에서 '맛 좋은 살구'로 바뀌는 전환점이 됐다. 고개를 뻣뻣이 세운 채 '나 잘났다'고 혼자 떠들어봐야 나만 손해고 내 주변에 남는 것은 비루한 삶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만나는 많은 사람의 마음에 들어가려 나를 다그쳤다. 어리숙하게 보이기란 참 어렵지만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겸손과 배려를 익혔다. 주변 사람들에게 농담과 미소를 곧잘 건네는 등 모든 일에 적극적이고 친화력 넘치는 은행원으로 변모했다.

그렇게 은행 생활을 즐겼다. 토요일 오후가 되면 은행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아쉬워했고 월요일 아침이면 은행갈 생각에 콧노래를 절로 흥얼거렸다. 선배들의 칭찬은 계속됐고 업무 역량도 나날이 상승했다. 나를 어렵게 생각하던 여직원들이 "저녁 좀 사주세요"라며 연애상담을 부탁하기도 했다. 어느새 은행 안에서 '을지로지점 대부계 이순우'하면 '똘똘하고 일 잘하고 잘 웃는 촌놈'이라는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선후배·고객 가슴속으로 들어가길

쉴 새 없이 질책하던 선배와 그 속에서 깨달은 삶의 지혜가 없었다면 나는 그렇고 그런 월급쟁이였을 것이다. 이를 잘 알기에 은행장에 취임하자마자 후배들에게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더 낮은 자세로 활짝 열린 마음으로 고객에게 다가가라"고 주문했다. 고객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고객의 마음속으로 들어간 직원들에게는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가끔은 선배들이 내게 그랬던 것처럼 고객의 마음속에 후배들이 자리 잡을 수 있도록 강하게 다그치기도 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 직원들은 은행장의 뜻을 잘 헤아리고 있다. 다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실패를 자산으로 축적한 은행원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고객 섬김과 배려가 뼛속 깊이 스며든 '1등 은행원'이기도 하다. 현장에서 만난 고객이 "은행장님, 술 한잔 사요. 김○○ 차장 같은 직원을 둔 은행장님이 정말 부럽습니다"라며 우리 직원을 칭찬할 때면 무척 기분이 좋아서 몸 둘 바를 모른다. 당장 달려가 "감사합니다"라는 인사와 함께 그 직원을 꼭 껴안아주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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