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이슈 인사이드] "너도 나도 극복할수있다"… 서로 보듬으며 마음의 얼룩을 닦다

알코올 중독·우울증… 현대병 치유하는 공동체의 힘

쌍용차 해고 노동자와 가족들을 위한 집단심리 치료 현장에서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박사(모자이크 처리되지 않은 사람)와 함께 한 참여자들이 자신의 고통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있다

한 심리치료연구소가 개최한 ’ 피규어(관절이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들어진 인간.동물 형상 장난감) 만들기 워크숍’ 에서 참여자들이 완성한 형상들을 늘어놓고 의견을 나누고 있다.


고통 토로하고 회복 돕는 자조모임
자살자 유가족·질병 등 회복에 기여 음악·미술 등 병행하는 치료공동체 자신 잘못 털어놓고 노하우 공유
약물중독치료에도 효과 톡톡 치유대상자이면서 치유제공자로


미혼여성인 L씨는 대학을 졸업하자 마자 취직을 했지만 직장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직장상사에게 혼나고 동료에게 무시당하는 일상을 보내던 끝에 우울증이 왔고 결국 직장까지 그만뒀다. L씨는 "사람을 만나는 게 싫어 집에만 틀어박혀 있다 보니 '내가 나약해서 그렇다'는 아버지의 호통이 떨어지더라. 나 역시 빨리 나아서 사회로 나가고 싶었는데 아버지의 말을 들으니 더욱 움츠려 들었다"고 말했다.


그런 그녀가 다시 희망을 찾은 건 친구의 소개로 찾은 우울증 환자들의 모임을 통해서였다. L씨는"친구들이나 부모님에게 방문을 나서는 것도 힘들다고 말하면 이상한 사람인 것처럼 바라봤지만 여기서는 다들 이해할 수 있다며 어깨를 다독여줬다. 그럴 경우 어떻게 해보니 좋다라는 조언도 있었다. 항상 숨이 막힌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서는 그런 기분이 한결 나아진다"고 말했다.

각박한 경쟁사회 속에서 중독ㆍ우울증 등의 현대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가운데 치유적인 성격을 가진 공동체모임이 재조명되고 있다. 자발적으로 모임을 꾸리는 자조모임, 전문가가 함께 치유과정을 돕는 치료공동체 등의 조직이 있으며, 알코올ㆍ도박ㆍ약물중독 등에서부터 우울증ㆍ범죄피해 등까지 치료 영역도 다양하다.

◇울타리 아닌 디딤돌 되는 자조모임=자조모임(self-help)은 공통의 문제를 가진 사람들끼리 회복의 노하우를 나누고 서로의 어려움을 지지해주기 위해 자발적으로 형성된 모임이다.

도박ㆍ알코올ㆍ약물ㆍ성중독 등을 해소하기 위해 결성되는 자조모임은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치료모델이다. 많은 병원과 정신보건센터에서도 각종 암ㆍ당뇨병ㆍ우울증 등 질병별 자조모임을 운영하는 경우가 많고, 근래에는 이주여성ㆍ다문화가정ㆍ한부모ㆍ조손가정ㆍ귀농인 등 위한 자조 모임도 활발하게 결성되는 추세다.

특히 자조모임은 누구에게도 말하기 힘든 고통을 토로하고 나눌 수 있는 장소로 긍정적인 의미를 가진다. 꽁꽁 묻어둔 마음의 상처를 털어놓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으로 자살자 유가족 모임을 들 수 있다.

가족 중 누군가가 자살할 경우 유족 대부분은 큰 충격을 받는 것은 물론 죄책감과 수치심, 분노 등의 정서적 혼란을 경험한다. 아울러 아무도 이 고통을 이해할 수 없다는 불안감과 고립감에 다른 이들과의 만남을 기피하고 심각한 경우 '나도 따라 자살하겠다'는 충동이 생기는 경우도 있다.

"유가족들의 경우 같은 경험을 공유한 사람들로만 구성된 자조모임에서야 비로소 편안하게 말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병원 치료도 받아보고 사설 기관의 상담도 받아봤지만 이 모임이 그 어떤 전문가의 위로보다 훨씬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7주간의 프로그램을 진행하면 첫 주와 마지막 주에 각각 사전ㆍ사후 검사를 받게 하는데 결과를 보면 유의미한 변화가 나타난 것을 알 수 있다"

서울ㆍ대전에서 자살자 유가족 자조모임 '나나애(愛) 나무'를 운영하고 있는 나선영 한국생명의전화 국장의 설명이다.

그는 "고통을 털어놓는 과정을 통해 감정을 해소한 후에야 다른 일들이 조금씩 시야에 들어오고 비로소 진정한 회복의 과정을 시작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나도 너도 할 수 있다. 함께라면 더 잘할 수 있다"=자조모임에서 좀 더 발전한 것이 치료공동체(Therapeutic Community)다.

평소와 다른 격리되고 제한된 환경에서 이뤄지는 엄격한 공동체 생활을 기본으로 하고, 음악ㆍ미술 치료 등 다른 치료적 방법도 병행한다는 점에서 자조모임과 차별성을 가진다.

물론 구성원간의 아픔을 나누고 노하우를 공유하는 집단 모임은 치료공동체 프로그램에서도 핵심 요소로 작용한다.


공동체 구성원들은 자신의 잘못을 모두 앞에서 솔직하게 털어 놓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나쁜 품성과 태도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들로부터 이해 받고 수용되는 귀중한 경험을 한다. 나 스스로가 소중하고 가치 있는 존재라는 긍정적 정서가 싹트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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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이나 방임, 따돌림 등을 경험하며 형성된 자기 패배감이나 수치심 등을 치유하는데도 도움을 준다. 고통스러운 경험을 다른 이들에게 말하면서 상처를 직면하고 털어버릴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다.

지난 1일 서울 목동에서 문을 연 국내 1호 민간 약물중독재활센터 다르크(DARC•Drug Addiction Rehabilitation Center)는 이런 치료적 공동체를 약물중독치료에 도입한 사례다.

중독자들은 자조모임 형태의 미팅을 기본으로 한 공동생활을 하며 자신의 문제점을 깨닫고 과거의 생활방식을 수정해 나간다. 환자와 치료자가 함께 공동체를 구성해 상호작용으로 개인을 바꿔나가도록 하기에 일방적이고 수동적인 치료가 야기하는 패배감, 심리적 위축 등을 피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진다.

조성남 을지대 중독재활연구소장은 "한 사람이 지적을 하면 무시할 수 있지만 공동체 모두가 지적하면 스스로 문제 행동을 바꿔나갈 수 밖에 없다"며 "다른 환자들의 문제점을 발견하고 올바르게 바꾸어주는 과정은 스스로의 치료에도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이 치료모델의 가장 특별한 점은 대상자들 본인이 치료대상자이기도 하지만 치료제공자로서의 역할도 한다는 것이다.

실제 국내 다르크는 일본의 다르크 회원들이 모금한 3,000만원의 기금을 바탕으로 문은 열었고, 국내 다르크가 활성화될 동안에는 중독을 극복한 일본 다르크 회원들이 한국 회원들과 함께 생활하며 축적된 중독 극복 노하우 등을 공유할 계획이다. 중독의 경험을 가지고 이를 극복한 사람들이 롤모델을 자처하며 치료자로 나서는 셈이다.

조 소장은 "중독에서 회복돼 정말 행복하다는 사람들이 발벗고 나서 도와주겠다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경험"이라며 "실패와 자포자기의 경험만을 했던 중독자들이 중독에서 성공적으로 회복된 치료자들을 보면서 '나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키운다"고 설명했다. 실제 외국의 경우 중독에서 회복된 사람들이 치료자(조력자)로 활동하는 경우가 많고 그 효과는 뚜렷하게 입증되고 있다는 것이 그의 말이다.

개개인에 역할·지위 부여 대인관계·감정 표현 익혀
■ 치료공동체 어떻게 운영되나
"내 비밀을 털어놓는 것이 두려워 마음을 열지 않는다면 나는 결국 혼자가 될 것 입니다. 비슷한 처지에 있는 우리가 이곳에서 함께 나눌 때 나는 있는 그대로 참된 내 모습을 똑바로 볼 수 있습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며 내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더 좋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비행ㆍ학대아동 및 청소년을 대상으로 서울시립아동상담센터가 운영하고 있는 치료공동체'나우리'의 아침모임은 이같은 나우리의 철학을 구성원 모두가 함께 소리 내어 외우는 것으로 시작된다. 국내 최초로 치료공동체 개념을 도입해온 서울시립아동상담센터는 잘 짜인 프로그램과 스탭들의 열정적인 노력으로 성공적인 공동체를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센터 내 모든 아동과 스탭들이 모여 오늘의 할 일과 목표 등을 다짐하며 시작된 하루는 각종 프로그램들로 꽉 채워져 바쁘게 돌아간다.

프로그램은 공동체에 속한 모든 구성원들은 각자의 역할과 지위를 받고 그 역할과 지위가 변하는 과정이 치료의 회복단계와 맥락을 함께 하도록 구성돼 있다.

아동들의 역할은 현장에서 분리돼 막 입소한 '새내기', 역할을 맡아 충실히 수행하는 '나우미', 신입의 교육을 담당하는 '바르미' 공동체의 리더 역할을 맡는 '이끄미' 등으로 분화돼 있다. 아동은 입소 이후 각 역할 수행의 단계를 거치며 책임감과 소속감 등의 중요한 가치를 배운다.

또래집단과 함께 자신의 생각과 고민을 털어놓고 서로 나누는 시간인 참 만남 모임은 치료공동체의 핵심적 역할을 한다. 일주일에 1~2회 가량은 다른 이들과의 갈등과 분노 등을 언어적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용인하는 경우도 있다. 아이들은 이런 모임을 통해 대인관계 능력과 자신의 감정을 진솔하게 표현하는 방법을 익히는 한편 분노 등 부정적인 감정을 슬기롭게 다스리는 방법도 배운다.

이 밖에도 아이들은 다른 이와의 갈등이 아닌 내 안의 고민 등을 해소하는 정규집단 모임, 정규학과공부, 지적 학습이나 사회적 통합을 위한 세미나, 음악ㆍ모래ㆍ미술치료 등의 프로그램을 수행하며 다시 사회에 나가기 위한 준비를 한다.

최상국 서울시립아동상담센터 국장은 "폭력과 가출, 도벽, 집단 따돌림 등 아동ㆍ청소년의 문제행동 대부분은 어린 시절의 학대나 방임 등으로 형성된 어른ㆍ사회에 대한 배신감, 잘못된 역할모델로부터 습득된 일탈된 생활양식 등이 원인이 돼 발생한다"며 "치료공동체는 이런 아동들에게 그 동안 겪어보지 못한 인간적인 따뜻함과 상호작용을 경험하게 해 스스로가 자신의 역할과 사회적 기능을 선택해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경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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