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재창조되는 세계에 속한 존재이지요. …(중략) 인간은 자신의 자유를 발휘해서 세계를 지배하거나 군림하는 존재가 아니고 세계 속에, 즉 둥지 속에 있으면서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몽골의 게르(이동식 천막)처럼 그 안에 살면서 계속해서 움직이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을 거예요. 나 역시 철학과 예술 사이를 옮겨 다니며 둥지를 계속 만드는 과정 속에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한국 인문학적 지성의 대표 철학가인 박이문은 자신의 독자적 철학세계인 '둥지의 철학'을 이렇게 풀어간다. 철학자는 개념을 통해 세계를 구성하고, 예술가는 이미지를 통해 세계를 창조하듯 인간은 주어진 세계에 속해 있으면서 동시에 각자의 세계를 창조하며 살아간다.
100여권의 저서를 남긴 박이문의 사상에 대한 연구가 그간 학계에서 단편적으로 이뤄진 적은 있었으나 이처럼 그의 사상 전체를 본격적으로 아우르는 심층적 연구는 처음 시도됐다. 독일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고 한국에 와서는 하이데거학회장을 역임한 저자가 '둥지의 철학'의 기원이 된 박이문의 사유에서부터 배경,구조와 의의, 문제점에 이르기까지 체계적으로 탐구했다.
박이문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처럼 통합적인 '르네상스적 지성'을 추구했다. '철학적 사유처럼 투명하고, 예술 작품처럼 아름답고, 종교적 삶처럼 열정적으로' 살고 싶어 한다. 더불어 박이문은 지혜의 아름다움과 아름다운 지혜를 추구하는 '철학적 예술'과 '예술적 철학'을 지향하며 내면의 지혜와 아름다움을 통해 이상적인 세상을 꿈꿨다. 여기서 지혜란 명석하고 분명한 철학적 개념으로 한정되는 것은 아니며, 신비스러운 거리감으로 감히 접근할 수 없는 예술적 차원까지도 포함하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오늘날 '둥지의 철학'을 새삼 주목할 이유를 "'관계의 철학' '사이의 철학'으로서 시의적절성을 지니고 있다"고 저자는 분석했다. 전문 지식보다 통합적 지식을 통해 창조적 사고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는 이 시대에 박이문의 횡단적 사유, 동서양 철학을 넘나드는 크로스오버의 학문적 성과는 분명 의미있게 다가온다. 책의 말미에는 저자가 특별진행한 박이문과의 최근 인터뷰가 수록돼 있다. 2만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