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태평양전쟁이 일본의 패배로 끝나고 미군이 일본을 점령했다. 일본의 통치권은 점령군최고사령관인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에게 넘어갔다. 일본정부의 모든 행정업무는 연합군총사령부(GHQ)의 통제를 받았다. 대장성의 예산편성은 물론 통산성의 산업지원정책 계획도 당연히 담당 일본관리가 GHQ에 가서 승인을 받아야 했다.1997년 12월3일 한국 경제는 국제통화기금(IMF)의 경제신탁통치하에 들어갔다. 이날 서울에 도착한 미셸 캉드쉬 IMF총재는 신탁통치를 맡은 총독과 같은 당당한 모습이었다.
서울주재 IMF대표부는 이제 50년전 동경의 GHQ와 같은 위용을 과시하게 됐다.
금융실명제의 보완을 위해 무기명장기채를 도입하려고 해도 IMF가 반대하면 어려울 것이 뻔하다. 5백50억달러를 빌려주는 대신 한국이 과연 각종 구조조정 약속을 이행할 것인지에 대해 IMF는 감시의 고삐를 바짝 죌 것이다.
만일 한국정부가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으면 IMF는 자금지원을 중단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그러나 그럴 경우 IMF가 나서기 전에 한국은 CNN, 월스트리트 저널 등 주요 해외매스컴들의 비난공세로 코너에 몰릴 것이다. 국제적인 약속을 위반한 신뢰할 수 없는 국가라는 낙인은 한국경제를 재기불능상태로 몰고갈 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치욕이다. 나라꼴이 말이 아니다. 역사는 되풀이 되는 것일까. 비슷한 일이 3백여년전에도 있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의 상황이 그것이다.
병자호란의 비극은 기본적으로 청나라의 침략야욕 탓이다. 그러나 당시 국제정세에 깜깜했던 조선조정의 무능력과 당쟁, 부패라는 내부요인이 없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광해군은 적어도 국제정세만은 정확히 꽤뚫고 있었다. 무너지는 명나라와 떠오르는 청나라의 틈바구니 속에서 중립을 지키는 것이 나라의 안위를 보장받는 것임을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광해군을 폐위시킨 인조반정후 등극한 인조와 서인집권세력은 유교적 명분에 사로잡혀 청나라와 대결하다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고 말았다.
지금은 강대국이 심기가 불편하다고 약소국에 쳐들어가는 3백년전과는 다른 세상이다. 그러나 현재 전개되고 있는 세계적인 경제전쟁의 강도는 제국주의시대 전쟁의 강도 못지 않다. 경제전쟁의 승패에 따라 국민들의 생활의 질이 정반대로 갈라지기 때문이다.
위기는 갑자기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3백년전 청나라가 만주에서 신흥강국으로 급성장하고 있듯이 냉전붕괴후 세계경제는 과거의 사회주의권까지 포함된 전혀 다른 차원의 살벌한 「대경쟁시대」로 진입하고 있었다. 자본, 기술, 자원, 인력 등에서 확실한 우위를 확보하지 못하는 국가는 모래성 위에 서 있는 것과 같은 세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국제경제의 「패러다임」이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었다. 국제적인 투명성과 룰을 거부하는 국가는 경제가 멍들게 되어 있는 것이다.
동남아경제가 그래서 무너졌다. 『우리는 동남아보다 펀더멘털이 훨씬 좋다』며 위기를 애써 덮으려던 한국도 결국 넘어지고 말았다. 지난 7월 태국의 변동환율제 전환으로 동남아통화가 폭락하고 있는 와중에서 기아자동차 문제로 당시 재경원장관과 기아총수가 감정싸움으로 허송세월을 보낸 것은 병자호란때 주전파와 화전파로 국론이 분열되어 지리멸렬했던 것과 비슷하다. 다가오는 위기를 외면하는 것이야말로 최대의 위기였다.
일본을 점령한 GHQ는 일본정부에 대해 농지개혁, 재벌해체, 노동권보장 등을 지시했다. 이 개혁조치는 당시 일본에게 엄청난 고통을 강요했지만 그때의 쓴약이 경제대국 일본의 초석이 됐음을 부인하는 일본인은 거의 없다. 일본을 「아시아의 스위스」로 만들려 했던 맥아더의 이상을 딛고 일본인들은 세계2위 경제대국으로 우뚝 섰다.
우리에게도 희망은 있다. 우리는 한국을 「국제수준의 룰이 통하는 국가」로 만드려는 캉드쉬의 IMF 이행협약을 딛고 선진국으로 용틀임하면 되는 것이다.
모든 주권이 점령군 수중에 있었던 일본보다는 훨씬 유리한 여건이 아닌가.
만일 이 일을 제대로 해낸다면 후세 역사가는 우리 세대를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후하게 평가해줄 지도 모른다.『30년만에 최빈국에서 선진국문턱까지 올라갔다가 샴페인을 일찍 터뜨려 넘어졌지만 온 국민이 정신을 차려 다시 일어나 선진국으로 도약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