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거짓 개혁과 참 개혁/정운찬 서울대 교수·경제학(특별기고)

미국의 동부에 자리잡은 한 사립명문대의 얘기를 해보자. 이 대학은 명성에 걸맞는 학문적 성과를 보여 물리학과에서만도 노벨상 수상자를 10명 이상 배출했다. 그러나 이 대학에는 법과대학(원), 경영대학(원), 의과대학(원) 등 전문대학(원)이 하나도 없다. 이 대학은 1910년대부터 지금까지 이들 대학(원)의 설립 여부에 대해 계속 논의해왔으나 아직도 유보상태다. 찬성론자는 학교의 명성을 높이고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서, 그리고 반대론자는 교수사회의 일체감 상실과 일류 전문대학 육성에 드는 예산을 우려해서 자기들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누가 옳은지는 모른다. 하지만 제도란 한번 만들면 고치기 힘들고 없애기는 더 힘들기에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그들의 태도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크다.이와 대조적으로, 우리 국회는 충분한 토의도 없이 금명간 금융개혁에 관한 13개 법안을 한꺼번에 통과시킬 예정이라고 한다. 13개 법안에는 한국은행법개정안과 통합금융감독기구 설립에 관한 법률도 포함되어 있다. 다른 11개 법안은 몰라도 이 두 법은 그리 급한 것도 아니고 급하게 처리해서도 안되는 법이다. 그런데도 「개혁병」에 걸린 정부는 문제의 심각성을 잘 모를 뿐 아니라 집단이기주의에 물든 일부 재경위원들과 함께 13개 법안을 일괄 통과시키려고 한다. 재경원은 이 법안들이 통과되지 않으면 외국금융기관이 우리나라의 금융개혁의지를 의심하게 되어 우리 금융·외환시장의 불안이 더 극심해질 것이라며, 정치권과 언론에 설득과 경고를 일삼고 때로는 협박도 마다 않고 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우리나라 금융위기의 근본원인은 우리보다 외국에서 더 잘 알고 있다. 청와대와 재경원이 금융에 너무 깊이, 너무 오래 개입한 폐해가 지금의 금융위기를 야기한 것이 아닌가. 한국은행의 독립성은 껍데기만 남긴 채 통합금융감독기구를 재경원(또는 총리실) 산하에 두어 정부의 직접적 금융개입을 지속시킬 법안을 통과시켜야 우리의 대외신인도가 높아진다는 생각은 망상일 뿐, 모든 당사자들은 재경원의 금융개입이 획기적으로 완화되어야만 금융개혁이 이뤄질 수 있고 대외신인도 또한 올라갈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원래 이번 한국은행법의 개정취지는 세계경제가 시장주의 일변도로 흐름에 따라 시장 밖에서 경제에 개입하는 정부보다 늘 시장 안에서 경제조정을 하는 중앙은행에 독립성을 부여, 경제에 활기를 불어넣자는 것이었다. 이것은 한은총재가 금통위의장을 맡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한국은행과 재경원간에 적당한 세력균형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아무런 효과도 거둘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10년 전부터 두가지 이유에서 금융감독기관의 통합운영을 제안해왔다. 하나는 금융겸업화추세 속에서 은행, 증권, 보험감독원이 따로 기능하면 효율적인 금융감독이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한국은행의 독립성도 높이고 은행감독에 관한 모든 권한을 한은에 맡길 때 한은이 비대한 금융공룡이 될 부작용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중앙은행 고유의 건전성감독기능은 살려야 하며, 감독기구의 통합운영도 우선 각 감독기관의 자율성을 유지하면서 금융감독기구가 느슨한 조정기구로 활동하되 성과를 보아가며 장기적으로 통합금융감독원을 만들어도 좋다는 것이었다. 또 금융감독위원회나 금융감독원에 중립성을 보장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 법률안은 막강한 힘을 갖는 금융감독원을 재경원(실은 신한국당이 재경원과 총리실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지만) 산하에 둠으로써 재경원에 너무 많은 힘을 몰아주어 더이상 한은의 기능적 독립을 기대할 수 없게 만들었다. 정부, 재경위, 그리고 국회 본회의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재경원, 특히 예산실에 관한 정부조직법을 고친 후 그 틀 안에서 금융정책실, 한국은행, 그리고 금융감독위원회 간에 견제와 균형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금융제도 자체에 관한 논의도 더 해야 한다. 시간이 모자라면 11개 법안만 통과시키고 나머지 둘은 새 정부 들어서 해도 늦지 않다. 사실 금융개혁위원회가 발족한지 10개월이 되었지만 금융개혁에 관해 진지하고 충분한 논의가 이뤄졌다고 보기는 힘들다. 당초에 중장기과제로 삼았던 중앙은행이나 금융감독체계에 관한 법과 관련해서는 더욱 그렇다. 진지하고 충분한 논의없는 금융개혁이 1993년의 금융실명제처럼 졸속으로 끝날까봐 걱정이 되어서 하는 말이다. 지각있는 국회의원이라면 한국은행법개정안과 통합금융감독체계법안에 부표를 던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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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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