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재정으로 겨우 지탱해온 글로벌 경제의 힘이 부친 상태입니다. 경기는 점점 악화되는데 정책적 부양은 한계에 도달했다는 점에서 내년 글로벌 경제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일본 도쿄 아카사카(赤坂)의 사무실에 만난 사카키바라 에이스케 아오야마가쿠인대 교수는 "세계는 유럽에서 아시아로 무게중심이 옮겨가는 과정에서 구조적 불황 단계"라고 분석했다. 특히 내년에 대해서는 "매우 심각하다"는 표현이 수차례나 반복됐다.
2008년의 금융위기 발발을 예측했던 '닥터 둠'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도 앞서 2013년 글로벌 경제가 "전세계에 '퍼펙트 스톰(동시다발적인 거대 폭풍)'이 온다"는 암울한 시나리오를 제시한 바 있다. 유럽 위기 악화와 재정 절벽에 떨어지는 미국의 경기침체, 중국 경제의 경착륙, 인도ㆍ브라질 등 신흥국 경제의 가파른 둔화에 이르기까지 두 학자가 바라보는 내년 세계 경제의 모습은 닮아 있다.
이들의 비관론에 100% 수긍하지는 않는다고 해도 올 하반기 이후의 경제를 낙관하는 목소리는 좀처럼 듣기 어려워졌다. 반면 2008년 금융위기 때와 달리 글로벌 리더십은 거의 실종된 채 위기해법을 놓고 각국 지도자들 간 파열음만 커지고 있다. 지금 전세계 경제가 불황ㆍ불확실성ㆍ불협화음이라는 3불(不) 시대를 눈앞에 두고도 구원투수도 없는 위험한 시기를 통과하고 있는 셈이다. 이 때문에 자칫 내년 세계 경제가 2008년 이후보다 더한 혼란으로 빠져드는 최악의 시나리오도 배제할 수 없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이에 서울경제신문은 창간 52주년을 맞아 위기의 진앙지인 유럽과 세계 경기 회복의 열쇠를 쥐고 있는 미국ㆍ중국, 정책적 갈림길에서 커다란 고비를 맞은 인도와 일본 등을 현지 취재하고 기로에 선 세계 경제의 현 위치와 앞으로의 진로를 심층 분석한다.
◇전방위 위기 직면한 세계 경제=4년째 계속되는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 위기는 세계에 'R(recessionㆍ경기침체)'의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이달 중순 발표되는 유로존의 2ㆍ4분기 성장률은 1ㆍ4분기 0%에서 마이너스로 하락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지금까지 유로존 경기를 가까스로 떠받쳐온 독일도 힘에 부치는지 하반기에는 독일이 마이너스 성장으로 주저앉을 것이라는 예측이 전문가들 사이에서 나오고 있다.
유럽의 몰락은 유럽과 교역관계가 깊은 신흥국 경제의 고공비행을 가로막았다. 중국이 3년 만에 7%대 성장으로 주저앉았고 올 1~3월 인도의 성장률은 9년 만에 최저인 5.3%까지 떨어졌다. 브라질의 올해 성장률은 민간 예측 기준으로 2%에도 못 미친다. 연말 이후 경기회복을 기대하는 목소리도 일부 제기되고 있지만 2008년 금융위기 당시에도 순조로운 성장을 이어가던 이들 브릭스(BRICs)의 고성장 신화가 이대로 막을 내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미국 경기도 심상치 않다. '채권왕'으로 불리는 빌 그로스 핌코 최고투자책임자(CIO)는 최근 "미국 경제가 침체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암울한 메시지를 내놓아 시장의 위기감을 증폭시켰다. 사카키바라 교수는 "미국이 이미 일본과 같은 '잃어버린 10년'에 진입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가속도가 붙은 유럽의 몰락과 신흥국 경제의 위기, 특히 세계 경제의 양대 축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의 침체와 중국 경착륙이 현실화할 가능성이 고조되는 가운데 세계 경제는 믿고 의지할 구원투수 하나 없이 거대한 'R의 공포'에 직면해 있는 형국이다.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세계 경제…하반기가 중대 기로=이미 마이너스 성장으로 돌입한 유럽을 제외하면 현재 상태에서 미국이나 중국ㆍ인도 등 각국 경제의 앞날을 침체나 경착륙으로 단정짓기는 어렵다. 중국ㆍ인도 정부의 경기부양능력에 대한 기대감이 살아 있는 것은 물론이고 미국에 대해서도 회복을 예상케 하는 요인들은 분명 남아 있다. 최근 로이터통신이 전세계 이코노미스트들에 대해 실시한 조사에서는 세계 경제가 올해 유럽 침체의 여파로 힘든 시기를 보내겠지만 내년에는 중국 경기가 회복되는 등 상황이 다소 개선될 것으로 전망되기도 했다.
문제는 각국 정부가 뚜렷한 방향성과 리더십을 갖고 경제를 끌고 나가기 어려운 정치적ㆍ경제적 상황에 처해 있다는 점이다. 총력을 기울여 침체에 대비할 수도, 낙관적인 청사진으로 시장의 불안심리를 잠재울 수도 없는 현 상황에서 세계 경제를 지배하는 것은 단결된 부양 의지가 아니라 극심한 불확실성이다.
오는 11월 대선을 앞둔 미국의 경우 정치권의 대립으로 재정절벽(fiscal cliff) 우려가 현실화할지 여부가 최대 변수다. 민주ㆍ공화당이 합의 도출에 실패할 경우 내년 1월부터 미국 경제는 재정지출의 대규모 삭감과 세금 인상으로 그야말로 낭떠러지로 추락할 것으로 우려된다.
올해 지도부 교체가 이뤄지는 중국 역시 계파 간 다툼에 따른 잡음에 더해 당국의 정책방향도 안갯속이다. 부동산 경기 과열이 확실하게 잡히지 않은 가운데 가시화된 경기 경착륙 시그널에 대해 당국이 오락가락하고 있는 것이다. 인도 역시 급강하하는 경기의 배경에 뿌리 깊은 부패와 불신이 도사리고 있다. 인도 무역상공단체인 IMC의 아닐 루이아 국제무역위원회 회장은 "인도 경제가 회복되려면 2년 정도는 걸릴 것"이라며 "특히 관리의 부패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성장은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했다. 미국과 브릭스 국가들은 올 하반기가 본격적인 침체와 회복의 기로다.
하지만 전문가들이 가장 주목하는 변수는 유럽이다.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와 이탈리아의 구제금융이 현실이 될 경우 거대한 충격파가 세계 경제를 뒤흔들 가능성이 높다. 세계 경제를 뒤덮고 있는 짙은 먹구름이 가랑비를 뿌리는 데 그칠지, 거대한 폭풍우를 몰고 올지는 앞으로 수개월간 각국의 행보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