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중앙은행(ECB)이 9일(현지시간) 국채 매입을 시작으로 앞으로 1년 반 동안 시행되는 총 1조1,000억유로(약 1,300조원) 규모의 양적완화에 첫발을 내딛었다. 하지만 구체적인 방안이 미흡한 상태로 양적완화에 착수했다는 비판과 함께 1유로=1달러의 '패리티(parity·동등가격)' 가능성, 그리스 불확실성 문제가 다시 제기되는 등 딜레마가 산적해 있다.
◇국채금리 하락 행진…손실분담 방안은?= 9일 ECB는 벨기에·프랑스·독일·이탈리아·스페인 등 5개국의 국채를 매입했다. 거래 규모는 개별적으로 1,500만~5,000만유로로 전체 양적완화 프로그램 규모에 비하면 소규모였다고 블룸버그통신은 전했다. 양적완화가 시작되면서 각국 국채금리는 하락 행진을 이어갔다. 독일 10년 만기 국채금리는 전 거래일보다 0.08%포인트 떨어진 0.31%를 기록했다. 현재 7년 만기 이내 독일 금리는 모두 마이너스(-)로 떨어진 상태다.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10년 만기 국채금리도 각각 사상 최저수준인 1.22%와 1.29%를 기록했다.
블룸버그는 ECB 지도부가 마이너스 수익률 채권 매입에 따른 손실을 어떻게 분담할지 합의하지 못한 채 양적완화가 시작됐다고 지적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국채지수 산정에 포함된 346개 채권 가운데 약 4분의1이 현재 마이너스 수익률을 기록하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유로존 중앙은행들은 현재 예치금리인 -0.2% 선에서는 필요한 양의 국채를 매입하겠지만 금리가 더 떨어지면 매입을 거부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ECB 내 영향력이 가장 큰 독일 중앙은행 분데스방크의 반대 목소리가 큰 것도 문제다. 선라이스브로커스의 지안루카 지글리오 채권리서치 전략가는 "분데스방크가 마이너스 수익률 채권 매입을 꺼린다면 난관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며 "분데스방크는 손실 분담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양적완화에 따른) 채권 매입에 아예 나서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덧붙였다. 양적완화 체제에서 채권 매입으로 발생하는 손실의 80%는 유로국 중앙은행들이 분담하도록 돼 있지만 분데스방크는 유로 취약국 채권 디폴트(채무불이행)로 인한 손실 분담에 소극적 태도를 보여왔다.
◇유로화 11년 반 만에 최저…그리스 불확실성까지= 유로화 하방 압력도 한층 강해졌다. 이날 유로·달러 환율은 장중 유로당 1.0785달러까지 밀려 지난 2003년 9월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이에 따라 1유로=1달러를 의미하는 패리티 가능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 사미어 사마나 웰스파고 전략가는 "패리티는 가능성 여부가 아닌 시간 문제"라고 말했다. JP모건은 올해 말 유로화가 1유로당 1.05달러 선까지 떨어질 것으로 예상했으며 디브양 샤 IFR마킷 글로벌투자전략가는 "1유로=1달러는 연내에 일어날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유로화 약세는 인플레이션 압력을 높이고 유럽 기업들의 수출 가격 경쟁력을 강화한다는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 하지만 독일 외에 다른 유로존 국가들은 통화 약세의 수혜를 입지 못하고 있어 유로존 전체가 괄목할 만한 성장을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그리스 불확실성이 다시 불거지는 상황도 부담스럽다. 그리스는 이날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유로그룹(유로존 재무장관 협의체) 회의에서 앞서 제출한 경제개혁안에 대해 합의에 이르지 못하자 11일 다시 협상을 재개하기로 했다. 유로그룹 회의에서 관계자들은 "그리스가 구제금융 연장 이후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며 "직접적인 자금 지원을 받으려면 당장 개혁을 실천하라"고 촉구했다. 그리스는 유로존의 양적완화 대상에서 유일하게 제외돼 시장의 잠재적 불안요인으로 남아 있는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