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광증」.한국표준과학연구원 김동호 박사의 「병아닌 병」이다.
金박사는 목숨을 걸었다고 해도 좋을 만큼 여러 빛(光) 가운데 레이저를 좋아한다. 그러나 햇빛을 비롯한 다른 빛은 될 수 있으면 사양한다. 레이저를 뺀 다른 빛은 그의 연구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연구 생활은 「올빼미」와 비슷하다. 자꾸 햇빛이 없는 곳으로만 숨는다. 그에겐 밤도 밤이고, 환한 대낮도 결국 밤인 셈이다.
그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그의 직업은 「사진사」와 비슷하다. 그 스스로도 자신을 「사진사」라 부른다. 실제로 사진 찍는 게 그의 주된 일이다. 당연히 대부분의 작업이 암실에서 진행된다. 대덕 연구단지에 있는 그의 연구실 또한 10여개의 크고 작은 암실로 꾸며져 있다.
그러나 일반 사진사와는 다르다. 우선 암실에서만 일한다는 점이 그렇다. 촬영을 위해 사진기를 들고 외부로 나가는 법이 없다. 모두 세트 촬영이다. 하지만 이 역시 일반 세트 촬영과 다르다. 환한 곳에서는 절대 작업을 할 수 없다. 모든 촬영이 햇빛 한 점 없는 암실에서만 진행되는 것이다.
찍으려는 피사체가 독특하기 때문이다. 다름 아닌 분자(分子). 그것도 에너지를 갖고 살아 움직이는 분자. 암실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분자는 크기가 가시광선의 파장보다 작다. 이는 햇빛을 통해서는 어떤 방법으로도 볼 수 없음을 뜻한다. 그러면서도 운동속도가 엄청 빠르다. 대개의 분자는 수십조분의 1초마다 회전운동을 한다. 셔터 속도가 이를 따라가지 못하면 운동하는 순간을 포착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일반 카메라의 셔터 속도는 100분의 1초에 불과하다. 분자를 찍기에는 꿈도 꿀 수 없는 것이다.
金박사가 레이저를 편애하는 까닭이 바로 이것이다. 모든 빛 가운데 극초단파 펄스 레이저만이 분자를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 그는 이 레이저를 이용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분자를 포착할 수 있는 사진기를 독자적으로 개발했다. 그의 사진기는 수십조분의 1초마다 셔터를 누를 수 있다.
앞으로도 그의 연구목표는 2가지다. 셔터 속도가 지금보다 더 빠른 사진기를 개발하는 일이 그 첫번째다. 그리고 직접 개발한 사진기로 온갖 분자나 반도체 등 신소재의 운동과정을 촬영하고 분석하는 일이 그 두번째다.
『어두운 곳에서 붉거나 푸른 레이저 빛만 들여다보고 있자니 눈이 많이 나빠졌습니다. 같이 일하고 있는 10여명의 연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어쩝니까. 레이저를 들여다보는 게 유일한 낙(樂)이고 취미인 것을….』
실제로 그는 밥을 먹거나 출장갈 때만 빼고 거의 레이저와 씨름을 한다. 평일에는 새벽 1시까지 작업할 때가 많다. 토요일도 오후 늦게까지 근무한다. 일요일에도 저녁 식사를 마치면 으레 연구실을 찾는다.
그는 특히 레이저에 몰두하기 위해 고려대 등 5~6개 대학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교수 자리를 마다하고 14년째 오로지 한 자리만을 지키고 있다.
그래서 한국표준과학연구원 분광연구실에는 『분자는 金박사의 눈(目)을 먹고 산다』는 우스개 소리가 있다. 金박사의 눈이 나빠지면 나빠질수록 분자는 열에 의한 변화 등 그 독특한 성질을 사람들에게 드러내보이기 때문이다. /이균성 기자 GSLEE@SED.CO.KR
한국표준과학연구원 金東晧 박사가 직접 개발한 레이저 분광기(사진기)를 통해 수십조분의 1초마다 회전운동을 하는 염록체 분자를 촬영하고 있다. 金박사의 연구실은 암실로 돼 있고 촬영할 때는 햇빛 한 점 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