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산업일반

[사면초가 한국 기업] 윗선 눈치보기 바쁘고… '타도 코리아' 거세지고… 투자 올스톱

권력기관 동향에만 촉각… 일상적 경영활동도 못해<br>정치리스크 손실 계산 분주<br>외국기업 제휴·특허訴 등 한국 견제도 갈수록 심화

서울 중구 남대문로 CJ그룹 사옥 앞에 켜진 빨간색 신호등이 안으로는 경제민주화와 사정당국의 강도 높은 수사, 밖으로는 해외 기업들의 견제로 어려움을 겪는 우리 기업들의 처지를 말해주는 듯하다. /서울경제DB


요즘 국내 주요그룹의 임원들은 서넛이 모이면 으레 흉흉한 업계 소문에 대한 뒷담화를 주고받는 일이 흔하다. 정부와 정치권ㆍ사정당국 등의 전방위 옥죄기에 대한 다음 타깃이 누가 될까 하는 것이다. 한화ㆍSKㆍCJ 등에 이어 모 그룹이 1순위이고 다음 그룹이 2ㆍ3ㆍ4순위가 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소문을 화제로 대화를 나누다 보면 정작 비즈니스에 대한 논의는 아예 뒷전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주요 그룹들의 컨트롤타워는 신사업 발굴, 사업 조율 등 일상적인 업무는 꿈도 못 꾼다. 24시간 정부ㆍ정치권, 여기에 검찰 등 사정당국의 동향과 움직임을 파악하는 데 혈안이 돼 있다. A그룹 고위 임원은 "더 심해지고 있다. 현재는 일상적인 경영활동도 윗선(정부ㆍ정치권 등)의 눈치를 봐야 할 정도다. '패닉' 상태가 더 어울리는 것 같다"고 토로했다. 기업을 더욱 어렵게 하는 것은 해외 기업, 정부의 견제 심화다. 무역구제 규제 대상으로 한국이 중국 다음으로 2위로 올라섰고 여기에 해외 기업들은 연합전선을 구축해 '타도 코리아 기업'을 더욱 힘껏 외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엔저에다 미국의 양적완화 후폭풍 등 글로벌 환경도 기업을 어렵게 하고 있다.


◇경영활동은 차 순위, 일 순위는 동향파악=기업의 미래를 위해 반드시 해야 할 '굵직한 투자 등 경영행위'는 꿈도 못 꾸는 것이 기업의 현실이다. 한편에서는 총수가 구속되고 다른 한편에서는 압박이 계속되다 보니 움직이지 않는 것이 속 편하기 때문이다.

'정중동'은 더욱 심해져 거의 스톱 상태가 돼가고 있다. 삼성그룹은 상반기가 다 지나가고 있지만 아직도 투자계획을 외부에 공개하지 못하고 있다. 총수가 구속된 SKㆍ한화그룹 등은 '총수 부재'로 그간 닦아놓은 굵직한 해외 사업이 위기에 처하지 않을까 전전긍긍이다. 정부에 도와달라고 속 편하게 이야기도 못한다. 비자금 수사로 홍역을 앓고 있는 CJ는 소소한 경영활동조차도 눈치를 봐야 하는 등 기업들의 속앓이는 더욱 커져만 가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주력사업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황까지 연출되고 있다. 실제로 모 그룹은 최근 계열사들에 주력사업 시장 점유율을 늘리지 말고 홍보도 자제해줄 것을 주문했다. 돈 벌었다고 하면 세무조사를 당할 여지가 많고 점유율을 늘렸다 하면 경제민주화의 타깃이 될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B 기업 홍보 임원은 "최고경영자(CEO)들을 상대로 '외부인 접촉을 금지할 것' '사람을 만나도 회사ㆍ사업 이야기 하지 말 것' 등의 지시가 떨어졌다"며 "또 잘하고 있는 사업도 잘한다고 홍보해서는 안 되고 가만히 있으라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경영활동은 아예 차 순위로 밀렸고 일 순위는 정부ㆍ정치권ㆍ사정당국 등의 동향 파악이다. 대관 업무, 홍보는 물론 스태프 조직들의 경우 서초동(검찰), 여의도(국회), 세종청사 등의 움직임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창조를 요구하면 창조에 맞춰주고 절전을 요구하면 절전 투자도 만들어줘야 하는 것이 기업의 현실이다. 장단에 맞춰주지 않으면 '화를 당한다'는 분위기가 기업에 만연해 있다.


◇"박 대통령까지 시그널을 줬는데"=정부에 대한 기업들의 불만도 폭발 직전이다. 기업의 기 살리기에 대한 박근혜 대통령이 확고한 방향을 제시했는데도 정부가 이를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는 것이다. 경제단체의 한 관계자는 "박 대통령이 시그널을 주고 현오석 부총리가 기업 살리기를 외쳤지만 그뿐"이라며 "정부 당국이 이에 맞춰 실행방안을 내놓아야 할 텐데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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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이 그러다 보니 기업들은 경영활동보다 요즘 손실 비용 계산에 여념이 없다. 경제민주화 등 정치 리스크로 인해 자사 기업이 얼마나 손실을 떠안게 될지 분석하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고 있다.

D그룹 관계자는 "기업들의 최근 관심사는 투자 등을 통한 사업 역량 강화가 아니다"라며 "과연 이번 경제민주화 바람 등에 얼마나 손실을 안게 되고 비용은 얼마이고 또 어떻게 이를 만회할지 등"이라고 말했다.

기업들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수 많은 고초를 겪어왔다. 그때마다 엄청난 비용을 떠안았는데 이번에는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E그룹 임원은 이것에 대해 "힘만 있으면 다 기업을 손보려 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정부ㆍ정치권은 기본이다. 검찰에 국세청ㆍ공정위는 기업 옥죄기의 단골 손님이다. 여기에 관세청ㆍ금융당국 등 힘만 있으면 기업 괴롭히기에 동참하고 있다는 것이 재계의 시각이다.

F그룹 임원은 "기업은 엄청난 비용과 손실에 떨고 있는데 과연 이 비용을 정부나 정치권이 보상해 주느냐. 단 0원도 책임지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독해지고, 강해지고, 교묘해지는 한국 기업 견제=이런 가운데 해외 정부ㆍ기업의 우리 기업 견제는 한마디로 독해지고 강해지며 교묘해지고 있다. 특정 분야에서는 한국 업체들에 맞서기 위해 외국 기업들끼리 손을 잡는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엔저에다 미국의 양적완화 후폭풍도 기업의 경영예측을 더욱 어렵게 하고 있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2012년 우리 나라에 대한 세계 각국의 반덤핑 조사는 22건, 조치는 10건으로 전세계에서 중국에 이어 조사와 조치가 각각 두 번째로 많다. 이는 직전 해인 2010년 대비 2배 이상 증가한 것으로 2004년 이후 최근 8년간 가장 많은 수준이다. 선진국의 국제 카르텔 규제도 한국 기업에 집중되고 있다. 1996년 이후 우리 기업이 미국에서 부담한 벌금은 12억6,700만달러에 이를 정도다. 1,000만달러 이상 벌금이 부과된 61개 기업 중 한국 기업 수는 11.5%(7개사)에 불과했으나 벌금 액수는 22.8%(12억6,700만달러)에 달했다.

우리 기업을 대상으로 한 특허소송도 급증하고 있으며 특허소송 상대도 기존 완제품 업체 위주에서 부품사 등으로 확대되고 있다. 국적이 다른 기업들이 연합해 대항하는 사례도 나오고 있다. 독일 자동차 부품업체 보쉬와 일본 전지업체 GS유아사코퍼레이션ㆍ미쓰비시상사가 전기자동차 리튬이온전지 사업 제휴를 맺고 내년 초 합작사를 세우는 것이 한 예다.

이종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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