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애나는 고집센 왕의 현명함과 인간미를 발견하고 영국 고위층을 초청한 연회에서는 서로의 감정도 확인한다. 또한 애나는 왕국의 2인자 알락장군이 외세를 등에 업고 반란을 으키자 지혜롭게 왕을 도와 진압하는데 성공하기도 한다.56년 데보라 카와 율 브리너가 주연한 「왕과 나」를 리메이크한 이 영화는 당시 작품이 태국을 심각하게 왜곡했다는 태국정부의 거부로 방콕에서 찍지 못했다. 대신 왕궁 사전답사를 거친 조각가와 화가들을 동원한 가운데 142만M2 규모에 달하는 말레이시아의 한 골프장에 왕궁규모와 똑같은 세트를 설치해 찍었다. 이런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앤디 테넌트 감독은 자유분방하지만 섬세한 성격의 영국인 애나를 통해 아시아를 바라보면서 결코 인종적·문화적 우월주의에 빠져 방적인 「아시아 비하」의 우를 범하지는 않은 듯했다.
그러나 59년 당시 작품의 캐스팅이 거의 완벽할 정도로 좋은 작품으로 무명이던 율 브리너로 하여금 약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거머쥐고 톱스타로 부상하게 했던 반면, 조디 포스터와 주윤발의 호흡은 늘어지고 율 브리너와 데보라 카의 리드미컬한 티격태격을 보여줬던 당시의 감칠맛나는 연기를 기대하기에는 어려운 작품이다.
그러나 40여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제작된 「애나 앤드 킹」은 최고의 패션감각을 보여준 호화 양장본의 증보판이다. 수많은 태국사람들이 북적이는 항구에 아들과 함께 도착한 애나의 낯선 표정을 클로즈업시킨 첫장면은 데이비드 린 감독의 「인도로 가는 길」을 연상시키고, 아카데미 미술상과 의상상을 수상한 미술감독 루치아나 아리기와 의상디자이너 제니 비번의 감각으로 세트와 의상 배경의 색깔이 상호 보완적으로 조화돼 영화의 화려함을 더해주고 있다. 특히 제니 비반이 지은 의상들은 평범한 블라우스부터 궁중복식까지 시각적 포만감을 안기는데 충분하다.
따라서 이 작품은 온 세상을 짊어진 남자와 자기 안에 하나의 세계를 가꾸어 온 여자의 만남에 관한 이야기보다는 드넓고 맑은 강과 짓푸른 숲에 쌓여있는 왕궁과 가옥들의 이국적 정취를 물씬 풍기는 동남아를 2시간동안 관광하는 느낌의 영화로 다가온다. 31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