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심과 달리 2심 재판부는 기업 조직의 정점에 있는 회장의 책임을 더 엄격히 판단한 것이다. 총수의 입김을 따진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선고와 비슷한 맥락이다. 법조계에서는 이르면 다음달 1심이 선고될 최태원 SK 회장 재판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고 있다.
서울고법 형사6부(정형식 부장판사)는 17일 불법대출ㆍ분식회계ㆍ위법배당 등 총 9조780억여원의 금융비리를 저지른 혐의로 기소된 박 회장에 대한 항소심에서 징역 12년을 선고했다. 지난 4월 박회장은 1심에서 징역 7년을 선고 받았다. 반면 1심에서 징역 14년을 선고 받았던 김양(59) 부회장은 이날 2심에서는 징역 10년으로 형량이 4년 줄었다.
2심 재판부는 1심과 달리 불법대출의 최종 책임이 회장 겸 최대주주인 박 회장에게 있다고 판단했다. 1심 재판부는 "부산저축은행 임직원이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사업에 무리하게 뛰어든 것은 박 회장의 지시 탓"이라면서도 "박 회장은 경영업무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반면 2심 고등재판부는 "박 회장이 불법대출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부산저축은행그룹 지분을 22% 이상 보유한 최대주주로서 (박 회장의) 최종 승인 없이 대출이 이뤄졌다고 보기 어렵다"며 "횡령 등 다른 범행도 박 회장이 보고 받았기 때문에 몰랐다고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최대주주인 회장이 대규모 불법대출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는 것으로 최종 결정권자인 박 회장에게 더 큰 책임이 있다는 게 2심 재판부 판단이다.
김 부회장이 1심에 비해 낮은 형을 선고 받은 것도 같은 흐름이다. 회장이 사실상 최종 의사 결정권자이기 때문에 김 부회장의 책임은 상대적으로 적다는 뜻이다. 1심에서 김 부회장은 PF 등 업무를 사실상 주도했다는 점이 고려돼 박 회장보다 7년이 많은 징역 14년을 선고 받았다.
이번 판결은 16일 법정구속된 김승연 한화 회장 재판부가 내린 판단의 연장선으로 해석된다. 김 회장 측은 재판 내내 "배임 행위는 홍동옥 여천 NCC 사장이 단독으로 저지른 일"이라고 항변해왔지만 재판부는 "한화그룹 본부조직에서 김 회장은 CM(chairmanㆍ체어맨)'으로 불리며 김 회장을 정점으로 일사불란한 지휘체계를 이루고 있다"고 봤다. 이런 조직체계에서 김 회장이 배임 행위를 몰랐을 리 없다는 판단이다.
재계는 그동안 기업 총수는 개인 일정이나 인사 또는 대규모 인수합병 정도만 직접 결재할 뿐 일반적인 경영 사안은 전문 경영인에게 맡기는 '포괄적 위임'을 해왔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법원이 이 포괄적 위임에 대해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기 시작한 것이다.
법원이 총수 또는 회장의 책임을 무겁게 다루는 분위기가 감지되면서 당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등의 재판에도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계열사 자금 수백억원을 빼돌려 개인 투자에 사용한 혐의를 받고 있는 SK 최태원 회장, 최재원 부회장 사건의 경우 검찰은 최 회장보다는 최 부회장의 책임을 엄히 물어 최 부회장을 구속시키고 최 회장은 불구속 기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