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컬처프론티어] 최태지 국립발레단장

발레 韓流 꿈꾸는 문화CEO<br>1987년 정식 단원으로 입단 50주년 앞둔 국립발레단 산 증인<br>대중들에 친숙한 프로그램으로 국내무대 저변 확대 발판 만들어<br>"미래 무용수 키울 교육기관 절실" 국립발레학교 설립위해 고군분투


지난 2월 26일 저녁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에서 펼쳐진 낭만발레 '지젤'.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김주원(지젤 분)과 김현웅(알브레이트 분)이 완벽하게 소화하고 막이 내리자 4층까지 1,580석을 가득 채운 관객들이 일제히 기립박수를 보냈다. 수차례 이어진 커튼 콜은 10분이 지나도 끝날 줄을 몰랐다. 그 순간 누구보다 감격에 젖어 객석을 향해 연신 허리를 굽히며 인사하고 결국 눈물까지 흘리던 이가 바로 최태지(52ㆍ사진) 국립발레단장이었다. 올해 3년 임기의 연임에 성공한 최 단장을 최근 만났다. 1983년 객원 무용수로 국립발레단과인연을 맺은 이래 1996년부터 2001년까지 6년간 국립발레단장을 맡았던 기간을 포함하면 12년 동안 발레단을 이끌게 된 그는 내년이면 50년을 맞는 국립발레단 역사의 산 증인이다. 자신의 20대 초반부터 현재까지 국립발레단과 함께 숨쉬어온 최 단장은 한국을 발레 강국으로 도약시키겠다는 자신의 꿈을 향해 한걸음씩 꾸준히 걸어가고 있다. ◇재일교포의 한계, 발레로 극복=1959년 일본 교토에서 태어난 재일교포 출신의 최 단장이 무용수로서의 삶을 살게 된 계기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찾아왔다. 언니 따라 구경 간 발레학교에서 발레 강사의 우아한 자태를 보고 한 눈에 반한 것. 발레에 재능을 보인 그는 1968년부터 1980년까지 일본 가이타니 발레 아카데미에서 수학했다. 타고난 신체적 조건,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승부욕과 노력 덕택에 실력을 인정받았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일본에는 당시 발레학과가 없었기 때문에 유럽 진출을 염두에 두고 불문과에 진학했어요. 때마침 발레협회 추천으로 국비장학생으로 선발돼 문화청 장학금을 받아 파리 유학을 다녀올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는데 서류 심사에서 불합격했어요. 일본 국적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영원히 '이방인'일 수 밖에 없는 재일교포로서의 설움과 시련을 경험했지만 최 단장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자비(自費)로 파리 유학을 다녀왔고 그의 실력은 더욱 향상됐다. 최 단장은 일본 대지진이 누구보다 가슴 아프다. "일본에서 태어나고 성장했던 만큼 지난 주 유럽 출장 중에도 시시각각 소식을 전해들으며 가슴이 무척 아팠다"는 그는 "다행히 가족 친지들이 피해 지역과는 거리가 있는 교토에서 살고 있어 당장의 화는 면했지만 일본인들이 불행을 빨리 털고 일어날수 있도록 힘을 보태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에 뿌리내리다=1983년 객원 무용수로 참가한 '세헤라자데' 공연으로 국립발레단과 첫 인연을 맺은 최 예술감독은 1987년에 정식 단원으로 입단, 1992년까지 프리마 발레리나로 활동했다. "임선남 1대 국립발레단장을 일본에서 우연히 만날 기회가 있었어요. 재일교포 출신으로 무용하는 모습을 인상 깊게 봤는지 국립발레단 공연에 초청해 주셨죠. 당시 일본에는 국립발레단이 없었던 때라 일본보다 발레 수준이 뒤떨어졌던 한국에 국립발레단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신기했어요." 하지만 한국 생활이 처음부터 쉽지는 않았다. 재일교포 출신이라 한국말이 서툴렀고 언어 컴플렉스로 인해 동료 무용수들과 관계를 맺는 것부터가 난관이었다. "부모님이 태어난 곳에서 무용을 한다는 생각에 어떤 사명감 같은 게 생기더군요. 일본에서 무용할 땐 느끼지 못했던 내 정체성도 느끼게 됐어요. 고국에서 무용한다는 자부심으로 어려움을 극복하려고 애썼고 이젠 고생해서 키워주신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 같아 마음 한 켠이 뿌듯합니다." 최 단장은 1993년부터 3년간 국립발레단 지도위원, 1996년부터 2001년까지 6년간 국립발레단 제3대 예술감독으로 활동하면서 '해설이 있는 발레', '찾아가는 발레'와 같은 대중 친화 프로그램을 선보이며 발레의 저변 확대에 불씨를 당겼다. 오늘날 국립발레단을 대표하는 주역 무용수로 활약하는 김주원과 김지영 모두 이 시기에 성장한 발레리나들이다. 무용수의 자질이 향상되기 위한 전제 조건은 무대에 설 기회를 많이 갖는 거라고 믿는 최 단장은 '찾아가는 발레' 등을 통해 발레 대중화를 실천에 옮긴 것이다. 발레가 대중화되면서 국립발레단 정기 공연의 유료 객석점유율은 80%를 오르내린다. 아이 손을 잡고 찾아온 주부 관객부터 머리가 희끗한 중장년 부부까지 발레 관객층이 넓어지면서 발레 강국으로서 위상을 갖춰나가고 있다. ◇무용수 발굴 위한 국립발레학교는 필수= 7대 국립발레단장으로 첫 발을 내디딘 최 단장이 강조한 취임일성은 국립발레학교를 통한 발레 교육 체계화다. 그는 지방에 기숙사를 두고 전국에서 실력 있는 학생들을 뽑아 예술적 소양을 지닌 무용수로 키우는 것이 국립발레학교가 해야 할 일이라고 확신한다. "교육비 부담 없이 일반 학교 교과 과정과 함께 발레 교육을 체계적으로 시켜야 해요. 어렸을 땐 발레를 잘 하는 아이들도 사춘기를 지나면서 호르몬 밸런스가 달라져 무용수로서 적절하지 않은 체형으로 변하는 경우도 있어요. 18살이 돼야 프로 무용수가 될지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거지요. 국립발레학교에서 교육을 전담하면서 미래의 무용수를 키워야 합니다. 지금처럼 중고등학교 다니면서 사교육으로 비싼 레슨을 받는 행태는 바뀌어야 합니다." "세계적인 안무가 조지 발란신도 '발레단보다 발레학교가 먼저 필요하다'며 발레학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최 단장은 "발레강국 러시아를 비롯해 프랑스, 미국은 물론 신흥강국 중국마저 발레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학비가 국비로 운영되는 곳이 많다"고 전했다. 특히 중국 발레는 해를 거듭할수록 수준이 높아지고 있다. 러시아 발레를 벤치마킹한 만큼 러시아식 시스템을 들여온데다 인구가 많아 이상적인 체형을 갖춘 무용수를 찾기도 수월하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 차원에서 발레 교육에 힘을 기울이고 있는 점이 최 단장은 부럽기만 하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발레단인 베이징발레단이 1959년 설립됐지만 베이징발레학교는 그보다 2년 앞선 1949년 세워진 것이 대표적인 예다. 베이징뿐 아니라 광저우ㆍ상하이 등 발레단이 있는 대도시들은 모두 발레학교를 갖추고 있다. "지금은 중국이 부럽지만 머잖아 발레학교를 만들고 한국이 발레 강국으로 우뚝 서게 되는 날에는 남들이 한국을 부러워하게 만들 겁니다. "

관련기사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