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CI(IMPERIAL CHEMICAL INDUSTRIES)는 1926년 노벨인더스트리 등 영국내 4개 화학기업의 합병으로 탄생했다. 당시 독일, 미국 등에서의 강력한 카르텔 결성 움직임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2차대전이후 독일의 I.G. 파르벤이 바이엘, 바스프, 훽스트 등 3개의 기업으로 다시 분리되는 등 각국의 경쟁촉진 정책에 따라 카르텔이 와해되는 가운데서도 ICI는 과거의 형태를 유지하면서 상당 기간 독점적 지위를 유지하게 된다.ICI는 80년대초까지 순조로운 성장을 거듭하며 영국내 최대의 화학기업이자 최대 제조업체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다질 수 있었다. 그러나 ICI가 영국 및 과거 영국 식민지 시장에서의 압도적 지위에 안주하는 동안 다른 선진 화학기업과의 경쟁력 격차는 점점 더 벌어져 갔다. 이 때문에 ICI는 영국 국민들로부터 「잠자는 거인」이라는 비난을 받는가 하면 고객이나 투자가들로부터는 관료적, 보수적 기업문화를 지닌 비효율적 기업이라는 지적을 받아야만 했다. ICI의 구조조정은 바로 이러한 전통을 버리는 일로부터 시작됐다.
변신은 전통을 버리는 데서부터 출발
ICI의 구조조정 역사는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1단계는 80년대초부터 1993년 기업분할이 이루어지기까지의 시기다. 80년대초 ICI는 2차 석유위기로 인한 세계적 불황속에서 처음으로 적자에 시달려야 했으며, 이에 따라 강도높은 합리화와 함께 핵심사업 위주의 대대적인 사업재편을 시도하게 된다. 2단계는 신ICI와 제네카로의 기업분할 이후 1997년 신ICI의 유니레버 정밀화학품 부문 인수에 이르는 시기이다. 독자경영에 나선 양 기업이 새로운 기업문화를 구축함과 동시에 향후의 전략방향을 정립하는 과정이었다. 3단계는 새로운 전략방향에 따라 미래형 사업구조를 완성하는 단계이다. 현재는 3단계 구조조정이 진행중으로 ICI의 변신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ICI의 구조조정은 1982년 하베이 존스 회장의 취임과 함께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존스 회장은 경영조직의 개혁, 경영전략의 명확화와 실행, 경영진 및 종업원의 의식개혁을 중심으로 강도높은 구조조정을 추진하였다. 관료적 기업문화의 쇄신을 위해 존스 회장은 의사결정단계를 대폭 축소함과 동시에 외부로부터 전문경영인을 대거 영입하였다. 당시까지 지역별로 나눠져 있던 그룹 사업을 글로벌한 시야에서 경영을 수행하는 사업부문(INTERNATIONAL BUSINESSES)으로 재편한 것도 이러한 조치의 일환이었다.
한편 경기변동에 강하고 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분야에 집중한다는 사업전략하에 적극적인 M&A를 추진했다. 1984년 사내에 M&A팀을 설치하고 컴퓨터에 700~800개의 기업정보를 입력시킨 다음 회사의 전략에 맞는 기업을 탐색했다. 1983년부터 1989년사이 ICI가 인수한 사업은 무려 172개에 달하며, 매각한 사업도 79개에 달한다. 인수대상 사업은 주로 도료, 농약, 종자, 정밀화학품 분야였으며 매각대상은 소재, 공업용 화학제품 등 범용제품 위주였다. 지역별로는 유럽대륙과 북미지역에 대한 투자확대를 도모하여 영국내 매출비중이 1980년 58%에서 1992년에는 37%로 낮아지는 등 글로벌화의 진전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90년대들어 유럽경제가 불황에 빠져들고 석유화학 등 범용 소재사업의 성과가 급격히 악화되면서 구조조정 작업은 중단된다. 당시 상황은 데니스 헨더슨 회장이 회사 설립이후 60년만에 겪는 최대의 불황이라고 말할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다. 1990년 이익은 전년에 비해 절반 이상으로 감소했으며 주당순이익도 크게 줄어들었다. 그러나 이는 한편으로 경기변동에 취약한 구조적 문제가 다시 한번 노출된 결과이기도 했다. ICI가 정밀화학 중심으로의 사업재편을 추진하였다고는 하나 워낙 다양한 제품구조를 갖고 있어 M&A만으로는 사업구조가 쉽게 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1991년에는 기업매수로 이름을 날리던 핸슨이라는 투자가가 ICI의 주식 2.8%를 취득하면서 2대 주주로 부상하게 된다.
핸슨의 시도는 ICI를 영국의 대표적 기업으로 생각하는 여론의 압력에 밀려 1년만에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는 이후 ICI의 전략방향에 중대한 변화를 초래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즉 경영진에게 영국 최대의 제조업체도 기업매수의 위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경각심을 심어주었으며, 이를 방어하기 위해서는 주주의 이익을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교훈을 제공한 것이다.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인 ICI의 헨더슨 회장은 즉시 대책 마련에 나서게 된다. 기업 외부로부터의 객관적인 시각을 얻기 위해 SG 워버그의 존 메이요라는 재무전문가에게 자문을 요청했으며, 존 메이요는 ICI에게 기업분할을 제안한다.
1993년 기업분할 단행
당시까지만 해도 ICI가 기업분할을 적극적으로 고려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ICI는 종합화학기업으로서 사업간의 시너지 효과 극대화를 강조해 왔으며,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기업분할에 거부감을 보여왔다. 그러나 주주가치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 ICI는 최고경영진을 중심으로 수개월간의 비밀 논의를 거쳐 1992년 7월 기업분할을 공식 발표한다.
ICI가 기업분할을 단행하게 된 배경은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첫째는 분할전 ICI가 지나치게 다양한 사업을 영위해 왔다는 점이다. 그러다보니 관리조직의 비대화가 불가피했고 옥석이 혼재된 사업구조로 수익성이 나쁜 사업도 일부 우량사업의 보조금을 받는 형태로 연명할 수 있었다. 이는 결국 ICI의 잠재적인 가치를 과소평가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즉 투자가들에
게 그룹 형태의 운영이 보다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증명하지 못했던 것이다.
둘째는 다양한 사업을 영위함에 따라 경영전략의 차별화가 요구되었음에도 이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80년대까지만 해도 ICI는 소품종 대량생산형의 소재형 사업이 주를 이뤘다. 그러나 의약, 농화학, 정밀화학 부문이 급성장하면서 양대 부문간의 이질감이 심화되기 시작했다. 소재형 사업이 자본집약형, 수직통합형, 비용중시형 특성을 지닌다면 정밀화학 사업은 연구집약형, 수평통합형(제품간 기술 플랫폼만을 공유), 기술중시형 특성을 지녀 문화 자체가 상이하며 결국은 양대 부문간
의 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기업분할의 목적은 결국 사업특성이 다르고 따라서 별개의 전략이 요구되는 부문을 분리함으로써 각각의 경영전략을 명확히 하고 방만한 자원 배분을 피하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취지하에 ICI는 1993년 6월 도료, 화약, 소재, 공업용 화학제품 사업으로 구성된 신ICI와 의약, 농화학(농약, 종자 등), 대부분의 정밀화학품 사업으로 구성된 제네카로 분할된다. ICI의 기업분할 발표 이후 분할효과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많았다. 즉 수익성이 양호한 사업(제네카의 사업영역)을 분리했을 때 상대적으로 수익성이 저조한 사업(신ICI의 사업영역)이 유지될 수 있을까하는 점이었다. 실제로 1991년 제네카 사업영역의 매출비중은 34%에 불과했으나 이익비중은 69%에 달해 이들 사업부문이 타 사업부문을 지원하는 형태였다.
그러나 이러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기업분할은 일단 순조로운 성과를 나타냈다. 1992년말 구ICI의 주식 시가총액은 76억파운드였으나 양사의 주가 상승으로 1993년말 신ICI와 제네카의 시가총액은 137억파운드에 달했다. 이의 주된 배경으로는 신ICI의 성과 호전을 들 수 있다. 신ICI는 우월한 시장지위, 기술적 우위성, 비용구조의 경쟁력 등을 고려하여 9개의 핵심사업을 선정하고, 나
머지 사업에 대해서는 대대적인 매각과 철수를 단행했다. 대대적인 비용 삭감과 동시에 1993년 폴리프로필렌, 나일론, 1995년 컴포지트, 에틸렌 옥사이드, 에틸렌 글리콜 등의 매각이 이루어졌으며, 이에 따라 경영성과는 차츰 호전되기 시작했다.
또한번의 승부수
기업분할 이후 ICI의 경영성과는 안정된 모습을 보였지만 이는 투자 억제, 조직 슬림화, 사업 매각 등 강력한 합리화시책에 힘입은 것이었다. 3~4년간의 적극적인 구조조정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범용 소재부문의 비중은 높았으며 1996년이후 경기하강국면이 시작되자 수익성이 악화되는 등 고질적인 문제점이 또다시 노출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ICI는 1995년 취임한 밀러 스미스 회장의 주도하에 범용부문의 비중을 대폭 축소하고 정밀화학 중심기업으로의 변신을 시도하게 된다. 비용 절감을 아무리 강력하게 추진한다 해도 범용 소재형 사업의 한계를 극복하는 데는 궁극적으로 한계가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이를 위해 ICI는 또한번의 승부수를 던지는 모험을 단행했다. 1997년 유니레버의 정밀화학품 사업부문(내셔날 스타치 등 4개사)을 49억파운드(약 80억달러)에 인수한 것이다. 많은 분석가들이 이들 사업부문과 ICI의 사업간에는 시너지를 거의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매수가격이 지나치게 높다고 평가했으나 스미스회장은 공정한 가격이라며 이들 사업의 전략적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ICI는 유니레버로부터의 사업인수이후 지금까지 ICI 오스트레일리아의 지분을 매각하는 등 약 50억달러 규모의 자산을 매각했다. 그러나 듀퐁에 대한 다이옥사이드(ICI의 이산화티타늄 자회사) 매각 계획이 최근 미국 공정거래위원회(FTC)의 이의 제기로 실패함에 따라 주가가 폭락하는 위기를 맞고 있다.
한편 제네카 역시 분할 이후에도 지속적인 구조조정을 추진하고 있다. 제네카는 의약과 농화학 등 생명과학(LIFE SCIENCE)분야에 집중한다는 전략방향하에 정밀화학 사업부문을 단계적으로 축소하고 있다. 이에 따라 섬유용 염료사업을 바스프에, 잉크사업을 선 케미칼에 매각한 바 있다. 최근에는 스웨덴 의약기업인 아스트라와의 합병설도 대두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