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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2월14일 서울 종로구 중학동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1,000번째 수요집회 현장. 중고등학생부터 중년의 여성까지 3,000여명의 인파가 몰린 자리에 정몽준(60) 전 한나라당 대표가 나타났다. 주로 야권 인사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자리에 한나라당 대선 주자가 나타나자 사람들은 당황했다. 곧이어 "왜 왔나" "들어가라"라는 외침과 함께 야유가 일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 전 대표는 마이크를 잡고 담담하게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발언을 끝까지 마친 후 무대에서 내려왔다. 사실 그는 오랜 기간 위안부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할머니들의 활동을 지원해왔다. 하지만 대중 가운데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정 전 대표는 국회에 갓 입성한 초선의원 시절, 위안부 출신 일본인 여성 시로타 스즈코씨의 경험에 관한 언론 인터뷰를 접하게 된다. 그는 당시 국회 대정부 질문을 통해 진상규명과 정부 대책 수립을 촉구했으며 아산재단 산하 병원을 통해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무료 진료를 제공하기도 했다. 1,000회 수요집회 자리에 있었던 한 참가자는 "언론 앞에서 사진 찍히는 데만 몰두했던 일부 인사들과 달리 위안부 문제 해결에 대해 꽤 진정성이 느껴졌다"고 평했다.
사회 문제를 향한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태생적 한계와 차별화된 정책적 측면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은 항상 그의 약점으로 꼽힌다. 실제로 같은 당 내에서 '대선 라이벌' 관계인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이 연일 복지에 목소리를 높이며 자신의 '생애 주기별 맞춤형 복지' 구상을 구체화하고 있는 것과 달리 정 전 대표만의 구상과 비전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정몽준'을 입력하면 '정몽준 버스비' '정몽준 70원' '정몽준 재산' 등이 연관 검색어로 제시된다. 정치를 시작한 지 벌써 20여년이 훌쩍 지났지만 아직도 그는 '정치인 정몽준'보다 버스비도 제대로 모르는 '재벌 2세 정몽준'으로 인식된다. 그가 위안부 문제 해결에 힘써왔으며 5,000억원의 사재를 출연해 만든 사회복지재단에서 청년창업과 실업대책을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은 언제나 '재벌 2세' 뒤편으로 묻혀버린다.
그 역시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지난해 9월 출간한 '나의 도전 나의 열정'에서 "내가 기업을 하든, 정치를 하든 사람들은 나를 단지 재벌 2세로 바라본다"고 고충을 털어놓기도 했다.
그는 이에 대한 해답으로 "정치가 잘 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분야에서 성공한 분들이 정치에 들어와야 한다"며 "여러 분야에서 경험한 성공의 불씨를 나누고 온 사회에 전파하는 역할을 정치인들이 해야 한다"고 제시한다.
2012년 '대선주자 정몽준'은 안팎으로 난감한 상황이다. 안으로는 그동안 장막 뒤에 있었던 박 위원장이 전면에 나서 대선으로 가는 발판을 확고히 다지고 있고 밖으로는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본인의 대선 출마 의지와는 별개로 높은 지지율을 보이고 있다. 반면 정 전 대표는 새해 각 언론에서 집계한 여론조사에서 2%대의 낮은 지지율에 머물렀다.
정 전 대표의 반응은 의외로 차분하다. 그는 정치인의 인기를 '목욕탕의 수증기'에 비유한다. 그의 말처럼 정치인의 인기가 언제 어떻게든 변할 수 있는 것이라면 이제 지지율 반등을 위한 카드를 내놓을 때다.
■ 정몽준과 아버지 지난해 8월 정몽준 전 대표와 형제들은 5,000억원을 출연해 '아산나눔재단'을 만들었다. 재벌가의 기부이지만 바라보는 눈이 곱지만은 않았다. 20년 전에 못 이룬 정치적 욕심이 숨어 있다고. 당시 정 전 대표는 "내가 좋아서 하는 기부까지 대선을 의식해 한다면 내가 너무 처량하지 않겠나. 나를 '정치 노무자'라고 생각할 만큼 정치를 중시하지만 모든 것을 정치 때문에 하지는 않는다"고 밝혔다. 정치 노무자 정 전 대표에게 고 정주영 명예회장은 오늘날의 그를 있게 해준 존재이자 극복해야 할 존재다. 정 전 대표 스스로도 "내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아버지였고 이 세상을 가르쳐준 것은 축구였다"고 말한다. 정 전 대표는 매일 아침 식사를 하기 전에 경제신문의 조그만 기사까지 미리 챙겨 읽는다. 이는 사업에서부터 경제 전반, 정치∙사회 문제까지 모든 분야에 풍부한 관심을 가졌던 고 정 명예회장과 대화를 하던 습관이 남은 것이다. 모두가 불가능이라고 여겼던 1988년 서울올림픽 유치부터 남북 교류의 물꼬를 튼 1998년 소떼 방북에 이르기까지 정 명예회장이 보여준 뚝심은 그대로 정 전 대표에게도 이어지며 2002년 한일월드컵 유치로 연결됐다. 하지만 정 전 대표의 대선 출마는 언제나 정 명예회장의 대권 도전과 비교되며 세상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이에 대해 그는 1992년 대선 당시 아버지를 '초선의 기업인'으로 평하며 6선 정치인인 자신과 구별 짓는다. 대통령이라는 꿈을 결국 이루지 못했던 아버지의 궤적을 닮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가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는 오는 12월 대선에서 결판 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