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저공세 해도 너무하다" 亞국가 불만 갈수록 커져
환율전쟁 새 화약고 부상
英·뉴질랜드·호주도 달러 풀고 시장 개입
"세계경제 공멸 할수도"
미국과 일본의 엇갈린 통화정책은 글로벌 환율전쟁의 새로운 장이 열리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출구전략에 따라 '슈퍼달러'가 귀환한 가운데 일본은 엔화 약세를 노골적으로 유도함에 따라 유로존(유로화 사용 18개국) 등 다른 경제권도 양적완화 실시를 통한 환율전쟁에 동참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아시아는 새로운 환율전쟁의 화약고로 부상하고 있다. 아베 신조 정권의 양적완화 정책이 적의 레이다망을 피하는 '스텔스'처럼 교묘한 환율 개입정책으로 자국의 디플레이션을 해외로 수출하고 있다는 불만이 한국과 중국 등 아시아 국가들 사이에 쌓이는 상태다. 특히 세계 2위 경제대국으로 부상한 중국이 어떤 정책을 취할지가 주목된다. 가뜩이나 성장이 둔화되는 상태에서 엔저에 따른 부정적 영향까지 커지면 통화정책 변경을 통한 위안화 약세를 유도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이처럼 엔저에 대한 불만이 커지면서 주요국이 환율전쟁에 가세할 경우 가뜩이나 회복세가 취약한 세계 경제가 침몰할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된다.
◇스텔스 환율전쟁 본격화하나=지난 10월31일(현지시간) 뉴욕 외환시장에서 엔·달러 환율은 일본은행(BOJ)의 추가 양적완화 발표에 힘입어 장중 한때 112.48엔까지 올랐다. 2007년 12월31일 이후 약 7년 만의 최고 수준이다. 달러 대비 엔화 가치는 2012년 중순 이후 40% 이상 하락했다. 이날 뉴욕증시에서 다우존스종합지수와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지수도 1% 이상 오르며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유럽 증시도 범유럽지수인 스톡스600지수가 1.84%나 급등하는 등 상승했다.
이처럼 일본의 양적완화 조치에 주요국 증시가 환호하고 있지만 결국 환율전쟁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경고음이 커지고 있다. 이날 텔레그래프는 "엔화 약세는 중국·한국 등 아시아 지역에서 통화갈등 심화로 이어지고 유로존의 디플레이션 탈출 여지도 제약할 것"이라고 전했다.
일본의 선제공격으로 유로존도 추가 자산매입을 통해 유로화 약세를 유도할 것이라는 전망도 커지고 있다. 유럽중앙은행(ECB)이 오는 6일 열리는 통화정책회의에서 추가 부양책 신호를 내놓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기존의 커버드본드 매입이나 자산유동화증권(ABS) 매입, 목표 장기대출 프로그램(TLTRO)으로 디플레이션 탈출이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미 영국·뉴질랜드·호주 등 주요국들은 유로화와 엔화 약세에 맞대응해 속속 외환시장에 달러를 풀거나 구두개입을 단행하고 있다. 뉴질랜드와 호주의 경우 주요 수출품인 원자재 가격 하락에도 엔캐리 트레이드 자금이 몰려들면서 통화가치 상승으로 경기회복에 부담을 주는 실정이다. 한국도 엔화 약세로 수출경쟁력이 하락하자 올 10월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인하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이날 "지난 2년간 주요국들은 일본의 엔화 약세 유도에 대응을 자제했지만 보복은 시간문제"라며 "결국 글로벌 디플레이션 악화와 성장둔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보도했다. 또 블룸버그의 분석에 따르면 내년 통화가치 하락이 예상되는 국가 10곳 가운데 8개국이 현재 디플레이션 위기를 피하기 위해 통화절하를 유도하고 있다.
◇아시아가 환율전쟁의 최대 화약고=수출의존도가 높은 아시아 신흥국에 '달러 강세-엔화 약세'는 최악의 조합이다. 달러가 강세를 보이면 외환시장이 취약해지는데 수출 증가 등 긍정적인 효과마저 일본이 다 가져가기 때문이다. 모뉴먼트시큐러티즈의 마크 오스왈드는 "엔화 가치가 달러당 120엔선에 근접하는 아시아 전역에서 비명소리가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1997~1998년 아시아 외환위기의 주범 가운데 하나는 바로 엔저였다. 당시 아시아 신흥국들은 연준의 금리인상 여파로 달러화가 강세를 보이자 외국인 자금 탈출에 시달렸다. 설상가상으로 엔화 가치 급락에 수출경쟁력이 떨어지면서 경상수지가 악화됐고 결국 디폴트(채무불이행) 위기로 내몰렸다. 엔화 대비 원화 가치의 경우 1995년 4월부터 1997년 2월까지 23%나 절상됐다.
이 때문에 중국이 추가적인 엔화 가치 하락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확산되고 있다. 이미 엔저는 중국 경제마저 위협하고 있다. 최근 파나소닉이 엔화 약세에 중국 공장을 일본으로 다시 이전하는 계획을 발표한 게 대표적인 사례다. 이는 일본 기업들의 본국 유턴의 신호탄일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또 위안화 가치는 엔화 대비 올 6월 이후 12.5% 상승하는 등 지난 2년간 50%나 올랐다. 소시에테제네랄의 앨버트 에드워드 전략가는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의 진앙지는 일본이었다"며 "이미 신용경색, 경쟁력 상실, 외국인직접투자 감소 등에 직면한 중국이 이 같은 통화 충격을 더 이상 참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 경우 아시아 무역 시스템이 붕괴 위기로 몰릴 수 있다는 우려마저 나온다. 다만 중국이 위안화 약세를 유도하더라도 미국을 의식해 외환시장에 직접 개입하기보다는 일본 식 경기부양책을 내놓을 것으로 전망된다. 실제 중국의 10월 제조업 구매관리자지수(PMI)는 50.8로 예상을 밑돌면서 시장은 중국의 통화완화 기조 유지에 베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