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세계의 사설] 블레어 없는 영국

그야말로 허수아비 신세다.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가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는 가운데 자신의 노동당 내 반란이 일어났다. 그들은 그의 사임을 강하게 요구했고, 결국 블레어는 1년 내에 자리를 내주겠다고 약속했다. 블레어 총리는 레임덕의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이제 영국과 미국의 유례없는 밀월(蜜月) 관계도 끝이 보인다. 남은 것은 쇄신뿐이다. 앞으로 남은 기간 동안 노동당은 블레어식 낡은 사회주의의 옷을 벗고 시대의 새로운 요구에 맞닥뜨려야 한다. 이는 마치 ‘철의 여인’ 대처의 말년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끊임없는 개혁은 블레어가 그동안 3선에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이기도 하다. 이제 노동당은 ‘블레어 없는’ 개혁을 해야 한다. 특히 블레어가 구축해온 국제 정치 관계를 정리해야 한다. 노동당 쇄신의 총대는 고든 브라운 재무장관이 메는 듯하다. 그는 오는 2010년까지 ‘새 노동당(New Labour)’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하지만 브라운은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다. 그의 생각을 좀체 읽기 어렵다. 국내적으로 그는 국가의 보다 큰 역할을 강조하는 듯하다. 국민연금제와 의료보험 분야에서 정부의 역할을 크게 본다. 전형적인 진보의 시각이다. 반면 경제와 대외 관계에서는 보수적 시각이 뚜렷하다. 친기업적인 정책에 찬동하고 미국에 우호적이다(admiring of America). 그렇다고 그가 블레어의 외교 노선을 따르는 것은 아니다. 브라운과 블레어의 극명한 차이는 외교 노선에서 드러난다. 브라운은 블레어가 미국의 대(對)이라크전에 동참하고, 코소보ㆍ시리아ㆍ레바논 등 각종 세계 분쟁에 개입한 것이 마뜩하지 않다. 블레어의 세계관에 동조하지 않기 때문이다. 블레어는 9ㆍ11 이후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세계 안보를 저해한다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인식을 함께 했다. 인식뿐 아니다. 행동도 따랐다. 부시의 대테러전에 언제나 동행했다. 부시의 ‘푸들’이란 별명은 그냥 얻은 것이 아니다. 브라운이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바로 이 점이다. 잊지 말아야 할 또 다른 한명이 있다. 데이비드 캐머런 보수당 당수다. 그는 지난해 블레어보다 5살이나 어린 나이(39)에 영국의 최연소 보수당 리더가 됐다. 그 또한 블레어와는 다른 영ㆍ미 동맹관을 지녔다. 그는 지난해 “영ㆍ미 관계는 돈독해야(solid) 한다. 하지만 미국과의 우정이 종속적(slavish)으로 전락해서는 곤란하다”고 언급했다. 그는 현재의 영ㆍ미 관계에 수정이 불가피하다고 보고 있다. ‘포스트 블레어’로 주목되는 브라운이나 캐머런 모두 블레어와는 다른 길을 갈 듯하다. 향후 미국은 예전 같은 영ㆍ미 관계를 유지하기 어려워 보인다. 미국은 긴장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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