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만파식적] '혼술' 고독과 낭만 사이


대학 시절 독특한 행동으로 유명한 동창이 한 명 있었다. 그의 가방 속에는 책이 없었던 적은 있어도 녹색의 소주 두 병 이상이 빠진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강의실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날이면 언제나 근처 잔디밭에서 혼자 깡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렇게 그의 발길이 머물면 그곳은 어김없이 술자리가 됐다. '혼자 마시는 술(獨酌)은 석 잔을 마시면 위대한 도에 통하고 한 말이면 자연과 합치된다'고 당나라 시성(詩聖) 이백(李白)이 말했던가. 그 말이 사실이라면 이 동창은 자연은 물론 온 우주와 일체가 됐을 것이다. 하기야 학교 운동장은 최루탄 냄새로 찌들고 TV와 신문은 온통 '땡전 뉴스'와 시위 소식으로 도배되고 있었으니 당시 청춘들이 어찌 술 없이 살 수 있었을까. 함께가 아니라면 혼자라도 술로 고뇌를 씻어야 했을 터다.

아무리 아픈 청춘을 보냈어도 시쳇말로 '혼술(혼자 마시는 술)'의 원조를 따지면 이 땅의 아버지들이 돼야 한다. 직장에서 상사의 잔소리와 후배 뒷소리에 시달리고 집에서도 넉넉하지 못한 월급봉투에 기를 펴기 힘들었기에 아버지들은 혼자라는 고독함과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 투명 액체를 찾았다. 축 처진 어깨로 포장마차에서 혼자 소주 한잔을 앞에 놓고 최백호의 '낭만을 위하여'를 부른다고 외롭지 않을 리 없다. 그래서 술을 왜 마시는가 하는 우문에 소설가 현진건은 이렇게 말했다. "술이 창자를 휘돌아 이것저것을 잊게 만드는 것을 나는 취할 뿐… 이 사회란 것이 내게 술을 권한다오"라고.

최근 한 마케팅업체가 '나 홀로 술'과 관련된 단어를 분석했더니 평소 '혼술'을 즐기는 직장인들이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모임과 회식 대신 눈치 보지 않고 혼자 여유롭게 낭만을 즐기는 문화가 퍼지고 있다는 뜻이다. 청승의 대명사로 통하던 나 홀로 술이 이제는 낭만과 즐거움의 표상이 됐다니 격세지감이다. 그래도 혼자 잔을 기울이는 이를 보면 어딘지 안쓰럽다. 역시 술잔은 돌아야 제맛 아닐까. /송영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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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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