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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훈(62) 서울시립교향악단 예술감독의 재계약 체결 안이 정씨 부인 구모(67)씨의 성추행 조작 파문이 불거지면서 28일 서울시향 이사회를 통과하지 못한 채 보류됐다. 재계약 건을 일단 내년 1월 중순 임시 이사회를 열어 재논의하기로 했지만 구씨가 경찰 수사 대상에 오르면서 재계약이 실제 이뤄질지는 미지수다. 이달 31일로 계약이 만료되는 정 감독은 당분간 예술감독 지위를 상실하는 상황도 불가피해졌다.
이날 이사회에 참석한 최흥식 서울시향 대표는 이사회 직후 기자들과 만나 "정 감독과 재계약 해야 한다는 공감대는 형성됐지만 계약 기간을 놓고 의견 차이가 있었다"며 "정 감독과 추가 협의를 거친 후 1월 중순 이사회를 열어 재논의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표면적으로는 계약기간에 대한 이견을 내세웠지만 구씨의 성추행 조작 연루 의혹이 불거진 시점에서 이사진들이 정씨와의 계약을 추진하는데 도덕적 부담이 컸던 것이 재계약 보류의 근본적 원인이라는 분석이다. 이에 따라 1월 재계약 여부도 불투명한 상황이다.
이사회를 하루 앞두고 구씨가 박현정 전 서울시향 대표에 관한 성추행 허위사실을 유포하도록 지시한 혐의로 이달 중순 경찰에 입건된 사실이 알려졌다. 지난해 12월 서울시향 직원들은 익명의 호소문을 통해 "박현정 전 대표의 막말과 인권 탄압, 성희롱에 시달렸다"는 내용을 언론에 배포하고 박씨를 성추행 혐의로 경찰에 고발했다. 하지만 경찰은 박씨를 지난 6월 무혐의 처리하고 거꾸로 시향 직원 고발자 10명을 허위사실 유포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입건했다. 이어 이달 중순 구씨가 허위사실 유포를 지시한 혐의로 입건되면서 정 감독도 이 사건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 됐다. 정 감독은 그동안 서울시향내 자신의 입장과 행동을 구씨를 통해 전달하는 등 구씨가 사실상 매니저 역할을 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국적인 구씨는 지난달 12월 박현정 성추행 사건이 터진 직후 출국해 프랑스에 거주중이며 입국하지 않고있다.
정 감독은 여기다 자신의 시향 공금 횡령 의혹으로 수사까지 받으면서 논란의 중심에 서자 지난 8월 언론 인터뷰를 통해 연말 재계약을 안할 수 있으며 하더라도 무보수로 일하겠다고 밝혔다. 이날 안건에 오른 정 감독의 재계약 안은 3년 계약을 기본으로 연간 15억 원에 이르는 감독의 연봉을 정 감독 개인에 지급하지 않고 기금으로 조성, 서울시향 단원들의 기량 향상과 교육을 위해 사용하게끔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정 감독이 봉사하는 마음으로 임하겠다던 무보수 지휘 재계약건이 상정됐지만 이날 이사회에서는 구씨 성추행 조작 혐의가 불거지면서 재계약 여부를 포함해 재계약 조건에 대한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서울시는 이날 최종 의사결정기구인 서울시향 이사회 회의가 끝나기도 전에 정 감독의 재계약 여론이 좋지 않자 정 감독의 3년 재계약 건을 1년 재계약으로 변경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히는 등 공개 브리핑을 진행해 구설에 올랐다. 이날 이사회에 참석했던 한 고위 관계자는 "이사회 도중 서울시의 재계약 관련 브리핑 소식을 듣고 이사진들의 불만이 터져 나왔다"고 전했다.
정 감독 재계약 불가론까지 거론되지만 최종적으로는 올해 같은 1년 연장으로 가닥 잡히리라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정 감독을 대체할 만한 인재가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한 전문가는 "정명훈에 필적할 만한 지휘자를 찾으려면 국내가 아닌 외국을 봐야 할 텐데 그런 지휘자를 한국으로 불러오는 일은 상당한 시간과 비용을 들여야 할 것"이라며 "재계약이 안 될 경우 지난 10년 서울시향이 일궈온 성과에 타격이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경미·양사록기자 kmkim@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