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파리 인근의 사클레는 주민이 3,000여명에 불과한 작은 시골마을이다. 하지만 작다고 얕보면 큰코다친다. 이곳에는 전 세계 원자력 연구의 롤모델로 불리는 연구소들이 잔뜩 포진해 있으며, 파리를 유럽의 중심으로 만들겠다는 ‘그랑 파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첨단연구산업단지의 건설도 한창이다. 무엇보다 대한민국이 개발한 원자력 안전 실험장치 ‘아틀라스(ATLAS)’가 맹활약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사클레로 가기 위해 파리 시내 중심부에서 남서쪽으로 뚫려 있는 고속도로와 지방도로를 차례로 달렸다. 시내를 벗어난 지 1시간쯤 지났을까. 어느새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2~3층짜리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인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프랑스 원자력청(CEA)의 사클레 연구센터였다.
지난달 13일 터진 테러 사건 때문인지 정문의 경비는 삼엄했다. 장총을 든 경찰들과 민간 보안업체 경비요원들의 눈 동자가 분 주하게 움직였다.
1945년 설립, 7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CEA는 현재 1만6,000여명의 인력과 연간 43억 유로(약 5조3,000억원)의 예산을 사용하는 거대 원자력 연구기관이다. 프랑스 전역에 11개의 연구센터와 4개의 기술이전 지역센터를 보유하고 있는데, 사클레 연구센터도 11개 연구센터 중 하나로서 원자력 안전과 물리·기초과학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정문을 지나 내부로 들어서자 거목들이 줄지어 있는 정원과 잔디밭이 곳곳에 펼쳐졌다. 첫 모습은 연구소라기보다 잘 정돈된 공원 같았다. 센터 전체를 둘러보려면 성인 걸음으로도 2 시간은 족히 걸린다는 관계자의 설명도 떠 올랐다.
글로벌 원자력 안전 도우미
정문에서 5분을 걸어 도착한 원자력 에너지 시스템구조 모델 연구동. 바로 이곳에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원자력 안전 실험장치 ‘아틀라스(ATLAS)’의 실험 데이터를 활용해 프랑스의 원자력 안전 전산코드를 검증하고, 업그레이드시키는 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한국원자력연구원이 자체 설계·제작한 아틀라스는 원자력발전소에서 사고가 발생했을 때를 가정해 원자력 계통에서 일어나는 열수력 움직임을 종합 시뮬레이션 하는 거대 실험장치다. 이를 활용하면 복잡다단한 형태의 원자력 계통 열수력 관련 사고를 모의함으로써 원전 사고의 근 원적 대처와 예방이 가능하다. 때문에 2007년 국내에서 첫 가동을 시작한 이래 중요한 원자력 안전 실험장치로 인정받고 있다.
특히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한층 심각한 사고에도 대처할 수 있는 원자로 설계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원전을 보유한 모든 국가의 필수 인프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상태다. 이와 관련 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작년 4월 원자로 설계기준을 초과한 사고에 대비한 종합효과실험 강화를 위해 아틀라스 국제 공동연구 프로젝트를 출범시킨 바 있다. 오는 2017년까지 3년간 250만 유로(약 31억원)가 투입되는 이 OECD-ATLAS 프로젝트에는 미국과 프랑스, 독일, 중국, 일본 등 15개 국가의 22개 원자력 연구기관이 참여하고 있으며 최적의 원자력 열수력 안전해석코드 검증과 중대사고로 확대될 개연성이 있는 심각한 원전 사고 발생 시의 물리적 현상에 대한 새로운 고부가가치 실험자료 생산에 공동연구의 초점이 맞춰져 있다. 참고로 우리나라가 단독 주관하는 원자력 국제공동연구는 OECD-ATLAS 프로젝트가 유일하다.
현재 CEA는 아틀라스의 실험 데이터를 해석·비교하면서 프랑스 유일의 원자력 안전 전산코드인 ‘까따르’를 검증 및 업그레이드하는 중이다. 전산코드 프로그램은 원전에서 발생가능한 여러 현상들의 사전 예측과 검증에 필수적이기 때문에 새로운 원전을 건설하기 전에 반드시 개발해야 한다. 아 틀라스가 프랑스는 물론 주요 OECD 가입국들의 원자력 안전에 중요한 기여를 하고 있는 셈이다.
EA의 버나드 페이디드 OECD-ATLAS 프로젝트 책임자는 “아틀라스를 활용해 까따르 코드를 선진화시켜 차세대 연구로에 적용 할 계획”이라며 “한국의 아틀라스가 프랑스를 포함한 세계 원자력 안전에 있어 중요한 키를 쥐고 있다”고 밝혔다.
OECD 원자력기구(NEA)의 호니에 원자력안전기술규제 국장도 “원자력 안전 국제 커뮤니티에서 아틀라스는 매우 훌륭한 평가를 받고 있다”며 “아틀라스 실험 데이터의 국제적 공유가 글로벌 원자력 안전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전했다.
NEA의 기술로드맵에 의하면 2050년경 인류에게는 930GW의 원자력에너지가 더 필요해질 전망이다. 이를 충족시키려면 원전의 숫자를 현 380개보다 2.3배 늘려야 한다. 하재주 NEA 원자력개발 국장은 “이로 인해 국제 공조와 공동연구의 중요성이 날로 커지고 있다”며 “원자력 강국의 입지를 공고히 하고, 기술주도권을 확보하려면 우리나라에서 제2, 제3의 OECD-ATLAS 프로젝트가 계속 나와야 한다”고 피력했다.
프랑스의 원자력 안전 연구 기조 배워야
CEA 사클레 연구센터 내에는 방사선방호 원자력안전 연구소(IRSN)의 시설들도 즐비하다. 어디가 CEA이고, 어디가 I RSN인지 구분이 힘들 정도다. 관계자에 따르면 후쿠시마 사고 이후 IRSN에서도 조금씩 원자력 중대 사고에 대응하는 다양한 연구를 전개하고 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요오드 누출 대응 관련 연구다. 원전에서 누출된 요오드에 사람이 노출되면 그 즉시 갑상선으로 흡수돼 암발병 등 생명에 치명적 위해를 가하기 때문에 원자력 중대사고 연구의 핵심으로 꼽히고 있는 것.
실제로 한 실험실에서는 엔지니어들이 이런 사고에 대비한 최신 장비를 구축하느라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일부는 격납용기에 쓰일 다양한 필터를, 또 다른 일부는 요오드 필터의 정상 작동 여부를 검증할 실험장치를 조립 중이었다. 실험실 준비가 거의 마무리되어 가는 듯 연구진들은 새로운 연구를 앞두고 흥분 된 모습이 역력했다.
이곳에서 3분쯤 떨어진 연구동에는 IRSN의 원자로 수소 폭발 대응 실험장치인 ‘토스콴 (TOSQAN)’이 운용되고 있다. 7㎥급 소형 장치지만 ‘ 작은 고추가 맵다’ 는 속담을 온 몸으로 입증하고 있다. 정확도가 매우 높아 유럽을 대표하는 원자력 수소 중대사고 실험장치로 통할 정도다.
연구자들은 토스콴을 통해 원자로 내의 수소를 적절히 태울 수 있는 최적의 시스템을 연구한다. 원자로 내에서는 피복관의 산화로 인해 수소가 발생하는데, 제때 태워주지 않으면 폭발로 이어질 수 있는 탓 이다. 한 연구자는 “수소가 원자로 내에서 어떻게 움직이는지 예측한 결과를 바탕으로 촉매를 이용해 자연적으로 수소를 태울 수 있는 점화코일 기기를 어느 지점에 몇 개를 설치해야 하는지 결정하는 연구를 한다고 보면 이해가 쉽다”고 설명했다.
또한 토스콴 연구동의 이웃에는 ‘스타마니아(STARMANIA)’라는 독특한 이름의 거대 실험장치가 있다. 지름 1m의 파이프라인들이 지그재그로 얽히고설켜 있는데, 원자로 내부에서 압력차이가 발생했을 때를 가정해 방호문들이 얼마나 압력을 견딜 수 있는지를 실험하는 장소다. 그래서인지 실험실 한편에 찌그러진 철문들이 적잖이 보였다. 우리나라의 경우 아직 이 같은 연구를 하는 곳은 없는 실정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사클레 연구센터에는 유럽 최대의 지진 실험시설도 운영되고 있다. 이름하여 ‘타마리스(TAMARIS)’다. 가로 6m, 세로 6m의 크기인데 최대 2,700톤의 콘크리트 구조물을 올려놓고 지진 모의실험을 할 수 있다.
연구실의 캐서린 베르지 박사는 “일반 빌딩은 물론 원전에 대한 지진실험이 가능하다”며 “지진에 의한 건물의 변이 관련해 전산코드를 개발하고, 산업계와 정보를 공유하고 있다”고 밝혔다.
현장취재에 동행한 한국원자력연구원 열수력안전연구부 최기용 박사는 “전통적으로 기초연구에 충실한 프랑스는 원자력 안전 연구에서도 과감하고 미래지향적인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며 “이런 기조를 우리나라도 눈여겨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INTERVIEW
하재주 OECD NEA 원자력개발국장
“2050년이 되면 인류가 필요한 원자력 에너지는 930GW에 달할 것으로 예견됩니다. 때문에 지금보다 원전의 숫자를 2.3배 이상 늘려야 합니다.”
올 2월 OECD 산하 NEA의 국장으로 선임돼 OECD 31개국의 주요 원자력 기술개발 총책임을 맡고 있는 하재주 OECD NEA 원자력개발국장은 원자력 에너지의 가치와 중요성을 이렇게 강조했다. 그동안 선진국 중심이었던 NEA의 고위직에 국내 인사가 선임된 것은 하 국장이 처음이다. 1993년 우리나라의 OECD 가입 이후 22년 만에 이룬 쾌거이기도 하다.
하 국장은 “그동안 원자력 분야에서 거둔 눈부신 성과에 만족해 자만하거나 독불장군이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며 “국제사회에서 고립되지 않도록 국제공동연구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Q. OECD NEA를 간단히 소개한다면?
OECD 회원국은 총 34개국인데 NEA 회원국은 31개국이다. 대부분 원자력 기술을 보유한 선진국이라 보면 된다. NEA는 원자력 선진국 전문가들이 모여 공통주제를 토론하고, 국제공동연구를 진흥함으로써 실질적인 원자력 활성화를 꾀하는 기관이라 할 수 있다. 원자력에 대한 주요 정책을 협의하고, 원자력 개발 및 이용 연구의 협력을 유도하 는 것도 중요한 역할이다.
Q. NEA에서 맡고 있는 역할은?
NEA에는 원자력 안전, 원자력 폐기물, 순수과학 등의 업무분야가 있다. 이 가운데 원자력 개발과 핵연료 주기를 맡고 있다. 현재 NEA의 국장 6명 중 유일하게 원자력 개발 업무를 담당하며, 원전의 경제성 분석과 핵연료 주기 관련 업무를 총괄하고 있다.
Q. 국가별 원자력 발전소 경제성 분석결과는 어떠한가?
2020년의 원자력 발전소 경제성 조사에서 재미있는 결과가 도출됐다. 한국과 중국의 원전 건설비가 놀랄 정도로 저렴하다는 것이다. 여타 유럽국가와 비교해 절반도 안 된다. 이 결과를 발표할 때마다 두 나라는 어떻게 그토록 저렴한지에 대한 질문을 굉장히 많이 받는다.
Q. 우리나라의 경제성이 뛰어난 이유는 뭔가?
유럽보다 인건비가 싼 것도 하나의 이유지만 지속적으로 원전을 건설해왔다는 사실이 가장 결정적이라 본다. 그로 인해 공급라인이나 프로젝트 관리, 숙련된 건설 인력 등을 모두 확보하고 있다. 다른 국가들은 어쩌다가 한번 건설하려 드니 너무 많은 것이 필요하고, 실수도 많아진다. 장비를 하나 구입하려 해도 뭐가 좋은지, 어디서 구입할 수 있는지 찾아다녀야 한다. 그러니 비용이 많이 들 수밖에 없다.
Q. 다른 나라의 상황은 어떤가?
우리나라와 해외의 상황은 많이 다르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원전 건설에 대해 독일은 어떻고, 미국은 어떻고 하는 얘기를 많이 하는데 좀더 냉정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각국마다 사정이 제각각이니 말이다. 유럽만 해도 원자력을 지속하겠다는 국가도 있고, 포기하겠다는 국가도 있다. 예컨대 영국은 지난 십여 년간 원자력에서 손을 뗐었지만 이제는 원자력 없이 버틸 수 없다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하지만 그동안 모든 노하우가 사라져 버려 어떻게 원자력 산업을 재건할지가 국가적 화두로 떠올랐다. 우리나라도 여러 사정 때문에 원전 건설이 주춤거리고 있는데, 그 영향이 나중에 생각보다 커질 수 있다. 지속성을 갖도록 하는 노력이 상당히 중요하다고 본다.
Q. 경제성 외에 우리나라의 또 다른 강점이 있다면?
정확한 일정 준수다. 현재 세계적으로 건설되는 원자로는 대부분 안전성이 향상된 3세대 모델이다. 우리나라와 미국, 중국, 핀란드 등이 3세대 원자로 건설을 주도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 국가 중 유일하게 우리나라만 당초 일정을 이행한다. 아랍에미리트(UAE)에 수출한 한국형 원전 ‘APR-1400’을 일정대로 건설 중이라는 사 실에 모든 사람들이 놀라움을 표명하고 있다. 반면 다른 나라의 3세대 원자로 건설은 하나 같이 연기돼 상당한 추가 비용이 발생했다. 실제로 프랑스의 원전 시공사인 아레바는 핀란드에 짓고 있던 원자로의 건설비가 너무 늘어나 회사가 휘청거렸다. 그래서 건설에서 손을 떼고 핵연료 서비스만 하고 있다.
Q. 원자력 에너지의 미래를 어떻게 보나?
기후변화 기술로드맵 보고서를 보면 산업화 이전과 비교해 지구의 온도가 2℃ 이상 상승하면 안 된다는 점에 전 세계가 동의하고 있다. 이른바 ‘2℃ 시나리오’다. 하지만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을 경우 무려 6℃ 이상 온도가 오른다. 그때는 지구에 난리가 난다. 2℃ 시나리오를 완성하려면 2050년에 이르러 현재의 원자력 발전량인 380GW의 두 배가 넘는 930GW를 원자력으로 생산해야 한다. 이는 원자력만이 살길이라는 식의 의미가 아니다. 이 수치는 신재생에너지를 포함해 모든 기술을 총동원했다는 전제 하에 원자력이 책임져야할 부분을 의미한다. 결국 미래에는 신재생에너지와 원자력의 결합 생태계 모델이 추구돼야 한다. 두 에너지는 결코 경쟁 관계가 아니다. 밀접하게 협력해야 하는 상생의 관계다.
Q. 국내는 어떤가?
2050년이 되면 지금 건설 중인 원전도 대부분 폐쇄해야 한다. 문을 닫는 원전이 계속 생길 것이다. 이제는 화력발전소를 계속 유지할 것이냐의 문제도 종합적으로 고려해봐야 한다. 현실적으로 우리나라는 아무리 노력을 해도 재생에너지 비율을 15% 이상 달성하기가 힘들 것이다. 때문에 원전을 더 지어야 한다고 본다. 우리에게 원자력 이외의 다른 옵션은 없다는 게 개인적 소견이다.
Q. 이에 대비해 우리나라가 풀어야 할 숙제가 있다면?
유럽 국가들은 지리적으로 비즈니스 조건이 좋다. 2~3시간이면 국가 간의 왕래가 가능하다. 반면 우리는 많이 떨어져 있다. 때문에 국제사회와의 교류와 협력이 더 중요하다. 평상시 국제기구에 참여해서 많은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해 놓아야 하며, 국제 공동연구를 장려할 필요가 있다. 그만큼 우리의 역량을 국제사회에 보여줘 위상이 높아질 테니 말이다. 물론 비교우위의 기술력과 가격경쟁력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ATLAS - 가압경수로 열수력 종합효과 실험장치 (Advance Thermal-hydraulic test Loop for Accident Simu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