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단어 ‘글래디에이터’(gladiator). 검투사, 노예 검사란 뜻이다. 라틴어 어원 ‘글라디아토르’와 뜻도, 철자도 똑같다. 오랫동안 쓰였어도 활용도가 높지 않건만 이 단어는 낯설지 않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2000년 흥행작 ‘글래디에이터’ 때문이다. 영화는 재미있게 감상했으나 사실과는 많이 다르다.
공화정으로 복귀하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를 아들인 코모두스가 방석으로 눌러 질식사하게 만들었다는 설정 자체가 역사와 맞지 않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아들을 믿지 못한 게 아니라 오히려 15세에 불과한 코모두스를 공동황제로 옹립해 후계자로 삼으려 애썼다. 로마의 최전성기라는 ‘5현제(五賢帝) 시대’의 양자(養子) 계승 전통도 이때 깨졌다.
로마군의 명장에서 음모로 인해 노예검투사로 떨어진 막시무스 배역을 맡은 배우 러셀 크로우의 연기가 돋보였으나 이 역시 설정에 가깝다.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는 것은 코모두스의 성격 정도다. ‘명상록’을 지은 철학자로도 존경받는 마르쿠스 황제의 유일한 실정은 후계자 선정이었다는 평을 들을 만큼 코모두스는 거칠었다.
검투사(글래디에이터)로 활약한 장본인도 코모두스다. 스스로 헤라클레스의 환생이라고 여겼던 코모두스는 소년 시절부터 몸 만들기와 검술 익히기에 몰두하고 즉위한 이후에도 로마 시민들 앞에 검투사로 나섰다. 원형경기장에서의 스포츠를 통해 황제의 인기와 권력을 유지하려는 포퓰리즘적 사고에 젖어 있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검투사 황제 코모두스의 전적은 735전 전승. 대전료도 꼬박 챙겼다. 주로 약한 상대를 골랐기에 영원할 것 같았던 그의 연승 기록은 노예 검투사 출신의 검술 연습상대에 의해 깨졌다. 경기장이 아니라 목욕탕에서 칼에 찔려 죽었다. 192년 12월 31일, 31세의 젊은 황제 코모두스의 암살 소식이 전해지자 로마는 환호했다.
직접 검투사로 뛰면서까지 인기에 연연했던 코모두스의 죽음을 로마 시민들이 반긴 이유는 경제난 탓. 방탕하고 사치한 그는 선대 황제들이 쌓아놓은 영화를 순식간에 날려 먹었다. 날마다 호화 파티로 밤을 지새고 인기가 떨어질 것 같으면 국가 재정으로 ‘검투사 놀이’를 펼쳤으니 경제난은 당연지사.
역사가와 문인들도 이 대목에 주목했다. 로마사 연구의 기본으로 손꼽히는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의 제 1권(1776년 출간)은 코모두스 이전 두 황제 시절의 영광을 잠시 보여주고는 하강 일변도를 걷는 로마를 담았다. 한때 장안의 지가를 올렸던 ‘로마인 이야기’를 지은 시오노 나나미도 ‘코모두스가 본격적인 쇠퇴의 시작’이라고 본다. 코모두스가 등장하는 편(로마인 이야기 11권)에 달린 제목이 그의 치세에 대한 평가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종말의 시작’.
코모두스는 화폐 남발과 통화 타락(debasing the currency)으로 몰락을 앞당겼다. 새로 정복하는 땅이 없이 변경의 야만족과 돈으로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코모두스는 금과 은이 필요했다. 놀자판 재정 운영까지 겹쳐 나라 곳간이 비자 코모두스는 은화 데나리우스에 들어가는 은의 함량을 줄여 차익을 호주머니에 넣었다. 돈이 가치가 떨어지니 물가가 급등하고 마치 가속 페달을 밟을 것처럼 재정은 궁핍해져 갔다.
물론 로마 화폐 타락의 시초는 코모두스가 아니다. 서기 37년부터 68년까지 30년을 통치한 네로 황제가 그 시발점. 네로가 떨어뜨렸으나 120년 넘게 유지되어온 순도 90%를 코모두스는 단번에 70%로 깎아내렸다. 코모두스 이후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군인 황제들이 활개치며 260년께 로마 은화 데나리우스의 순도는 5%까지 주저 앉았다. 함량이 극히 낮은 악화처럼 로마의 권위도 떨어졌다.
서로마 멸망(476년) 한참 전부터 거대제국은 병들어 있었다. 로마 멸망의 서곡은 머리 나쁘고 외국에는 약한 채 집안 싸움만 좋아하는 검투사 황제 코모두스의 악화 남발에서 울렸던 셈이다. /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