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5월29일] 미쓰이 다카토시

동서양 상거래 역사상 최초의 단일가격제, 분업 생산체제 도입, 상업광고와 화폐경제의 선구자. 하나같이 미쓰이 다카토시(三井高利)의 업적이다. 일본 최대의 기업군인 미쓰이그룹의 창시자다. 미쓰이가 에도(지금의 도쿄)에 포목점을 연 것은 1673년. 51세 때다. 동생의 상재(商才)를 시기해 장사를 금지시킨 큰형이 죽은 후에야 그는 자기사업에 나섰다. 개점 당시부터 그의 가게 ‘에치고야(越後屋)’는 관심을 끌었다. 무엇보다 관행인 외상을 주지 않았다. 현금으로 거래하는 대신 값을 깎아줬다. 한 필 단위로 직물을 팔던 다른 가게와 달리 단 한조각의 천도 끊어 팔았다. 전속 재단사ㆍ재봉사를 고용, 급한 사람에게는 그 자리에서 옷을 만들어주는 서비스를 선보이는 한편 공정도 재단과 바느질, 마름질 등으로 나눴다.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분업론을 제시하기도 전에 이미 경영에 도입한 셈이다. 박리다매, 소액다품종 생산, 고객 최우선 전략은 멋지게 먹혀들었다. 은퇴할 나이에 사업을 벌인다며 비아냥거리던 주변 상인들의 상권이 그에게 들어왔다. 핵심 고객층이 밀집한 지역에는 로고가 새겨진 우산도 뿌렸다. 상업광고와 사전 사은품의 효시에 해당된다. 종업원들도 그에게 충성을 다 바쳤다. 일이 고됐지만 일정기간이 지나면 분점으로 독립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쓰이는 얼마 안지나 에도의 상권을 휘어잡고 대금업에도 진출, 어음제도를 창안해 부를 불렸다. 1694년 5월29일 72세 나이로 몰(歿). 미쓰이의 뛰어남은 인생 말년의 불과 21여년 동안 최고 거상이 됐다는 점이 아니라 그 계승에 있다. 그는 ‘나라에 대한 충성, 봉사와 근검절약’이라는 유훈을 남겼다. 미쓰이 가문의 부와 이름이 11대손에 이르기까지 지켜져온 비결이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