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감독당국이 3일 황영기 KB금융지주 회장에 대해 ‘직무정지 상당’라는 중징계를 내림에 따라 후폭풍이 거세지고 있다. 경영상의 판단이 징계 대상으로 적절하느냐는 지적부터 다른 금융기관의 투자 실패 사례에 비해 징계 수위가 가혹하다는 형평성 논란까지 불거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황 회장이 이번에 금융맨으로서 사실상 사형선고에 가까운 중징계를 받음에 따라 ‘황영기 신드롬’이 거세질 것으로 우려도 나오고 있다. 금융기관들이 보신주의에 빠져 위험한 투자 결정을 주저하면서 결과적으로 국내 금융산업 발전의 걸림돌로 작용할 것이라는 얘기다.
◇금융당국 “황회장 규정 위반”= 금융감독원의 자문기구인 제재심의위원회는 황 회장이 우리지주 회장 및 우리은행장 재직 시절 부채담보부증권(CDO)과 신용부도스와프(CDS) 등 파생 상품에 투자하면서 위험성을 의도적으로 왜곡하는 등 관련 법 규정을 어겼다고 보고 있다. 금감원은 또 만기가 긴 고위험 상품에 투자하면서 안전장치를 제대로 갖추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금감원의 한 관계자는 “황 회장이 내부통제 제도를 준수해야 한다는 규정을 위반하고 은행 감독자로서 직무를 태만이 했다”며 “이번 징계는 금융기관 임원이 해당 회사의 건전한 운영을 저해하는 행위를 했을 때 제재할 수 있다는 은행법 54조에 해당된다”고 말했다.
◇징계 적절성ㆍ형평성 논란 지속될 듯= 금감원의 이 같은 설명에도 불구하고 논란이 가시지 않고 있다. 우선 경영 판단도 징계 대상이 될 수 있는지가 논란거리다. 경영상 판단에 따른 투자손실에 대해, 그것도 임기가 끝난 뒤 발생한 투자손실에 대해 최초의 투자 책임을 묻는 것이 옳은지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황 회장 측은 그동안 “천재지변에 가까운 금융위기로 발생한 유가증권 투자 손실은 감독당국의 제재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반박해왔다. 또 황 회장 본인이 직접 파생상품 투자 지시를 내린 적이 없고 부행장 전결로 이뤄진 적법한 투자였으며, 본인의 재임 기간에는 손실이 나지 않았고 후임자가 손실을 만회할 기회가 있었다는 논리를 펴왔다.
외부에서도 황 회장 의견이 동조하는 전문가들이 많다. 이종우 HMC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재직 중의 투자 잘못을 나중에 책임지라는 것은 무리”라고 말했다.
형평성 차원에서 황 회장에 대한 징계가 가혹하다는 지적도 있다. 이날 정용근 전 농협중앙회 신용대표의 경우 파생상품 투자 과정에서 관련 규정을 위반했지만 황 회장보다 한단계 징계 수위가 낮은 ‘문책’ 제재를 받았기 때문이다.
다른 금융기관의 사례와 비교해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공공기관인 한국투자공사(KIC)의 경우 지난해 2월 메릴린치에 20억달러를 투자했다가 원금의 반 가량을 날렸다. 하지만 이 투자에 책임지는 사람도 없고, 의사 결정권자가 누구였는지도 알려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또 하나은행은 메릴린치 주식을, 국민은행은 카자흐스탄 BCC은행 주식을 샀다가 엄청난 평가손을 입었지만 별다른 제재가 없었다.
반면 황 회장의 잘못은 투자 실패가 아니라 규정 위반 탓이기 때문에 징계가 적절하다는 의견도 많다. 김상조 한성대 무역학과 교수는 “금융회사 경영진은 일반 회사보다 더 엄격히 주의 의무를 다하고 감독당국의 지도나 외부 전문가의 조언, 관련 규정 등을 따라야 한다”며 “황 회장은 재임 기간 파생상품 투자 이외에 무리한 규모 확장 전략을 추구했고 그것이 우리은행의 심각한 부실채권 부담으로 귀결됐다”고 지적했다.
◇‘황영기 신드롬’ 확산 우려= 금융계에서는 황회장에 대한 중징계로 금융회사 경영진들의 몸사리기 행태가 확산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오세경 건국대 경영대학원 원장은 “투자 결과만 놓고 사후적으로 책임을 묻는다면 경영 활동을 하지 말라는 얘기”라며 “앞으로 금융기관 경영진들이 고위험 상품보다는 안전 자산에만 투자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 시중은행의 관계자도 “투자 잘못이 있다면 경영진에서 물러나는 것으로 끝나야지, 아예 금융권에서 퇴출시킨다는 것은 지나치게 가혹하다”며 “앞으로 최고경영자(CEO)들이 인수합병(M&A), 구조조정, 해외시장 개척 등 중대한 사안에 대해 적극적인 의사결정을 하겠느냐”고 반문했다. 관가의 ‘변양호 신드롬’과 마찬가지로 금융계에 ‘황영기 신드롬’이 퍼져 금융권이 움직이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오 원장은 “이번 황 회장 징계로 금융업계에도 책임 회피 풍토가 만연해지면서 금융 산업 발전이 늦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