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건설경기 장기 불황으로 위기를 맞은 건설업계에 해외 시장은 어둠 속의 한줄기 빛이다. 때마침 2000년대 말부터 중동 지역에서 공사 발주가 크게 늘면서 해외 건설 수주액이 급증했다. 2000년대 초중반 연 100억달러 미만이던 해외 수주는 2007년 400억달러에 육박한 데 이어 2010년에는 아랍에미리트연합(UAE) 원자력발전소 수주라는 '잭팟'이 터지면서 716억달러로 껑충 뛰었다. 이후로도 매년 600억달러 안팎의 수주액을 기록하고 있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는 법. 국내 건설사의 해외 수주가 최근 10년간 전례 없는 성과를 보이고 있지만 수행능력을 넘어서는 규모의 공사를 따낸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지난 4월 터진 '루와이스 쇼크'가 대표적이다. 돈이 되든 안 되든 최대한 일감을 확보해놓고 보자는 실적 위주의 경영 탓에 해외 건설시장에서의 국내 업체 간의 제 살 깎아 먹기 식 출혈경쟁과 이에 따른 저가수주 관행이 도를 넘어섰다는 비판이 거세다.
◇저가수주로 수익성 떨어지고 리스크는 커져=루와이스 쇼크가 터지자 업계에서는 "올 것이 왔다"는 반응을 보였다. 중동 등지에서 10억달러가 넘는 대형 프로젝트를 사흘이 멀다 하고 따내자 '해외 건설 르네상스 시대'가 도래했다고 환호했지만 이면에는 국내 건설사의 저가수주에 따른 수익성 악화라는 시한폭탄이 언젠가는 터질 것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국내 건설사 간 출혈경쟁이 어느 정도까지 심한지는 지난해 말 사우디아라비아의 국영 석유업체인 아람코가 발주했던 '자잔 프로젝트' 입찰 과정이 잘 보여준다. 입찰에 앞서 한 국내 업체가 예정가격보다 20% 낮은 금액에 수의계약을 시도하다 발주처로부터 거부당한 것.
이러한 저가수주는 수익률 저하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미국의 건설전문지인 ENR가 집계한 글로벌 225개 건설업체의 2010년 해외 건설 평균 수익률은 7.8%지만 국내 상위 5대 건설사는 3.1%에 그쳤다. 국내 건설사가 수주한 공사가 EPC(설계ㆍ조달ㆍ시공) 중심의 단순 도급사업 위주여서 투자개발형이나 기획제안형에 비해 마진이 박한 탓도 있지만 저가수주도 주된 요인으로 꼽힌다.
아이엠투자증권의 집계에 따르면 국내 6대 대형 건설사가 2009∼2011년 해외에서 수주한 저가사업은 계약액 기준 총 37조3,000억원에 이른다. 이복남 건설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국내 건설사는 수주 자체가 목적인 경우가 많다 보니 수익성과 리스크를 꼼꼼히 따지지 않고 덮어놓고 수주하는 경우가 빈번하다"면서 "치열한 입찰 경쟁을 뚫고 공사를 수주해도 기본설계와 FEED(기본설계와 상세설계의 중간 과정) 능력이 떨어지다 보니 공사 도중 문제가 자주 발생하고 공기 지연에 따른 손실은 고스란히 시공사인 국내 건설사의 몫이 된다"고 말했다.
공기를 지키지 못할 경우 계약금액의 0.1%를 매일 물도록 돼 있는 지체상금(벌금)은 계약가의 10%를 넘지 않는 것이 국제표준이지만 중동 등지에서는 실제 무한대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내 건설사의 기술력이 날로 향상되고 있지만 10억달러 이상의 대형 프로젝트를 공기 내에 끝마칠 수 있을 정도의 기술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다 보니 해외 사업에서의 리스크는 늘 상존하고 있다.
◇업역 구분 등 국내 법ㆍ제도 개선 시급=호주 로이힐 프로젝트 수주를 둘러싸고 국내 업체 간 과당경쟁 논란이 발생했을 때 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정부의 사전 개입이나 업체 간 조정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하지만 이는 있을 수도 없고 가능하지도 않다. 정부의 개입이나 업체 간 사전 협의는 명백한 담합이자 불공정행위이기 때문이다.
결국 건설사가 자율적으로 판단해야 하는데 수주 실적 증대에 목을 매는 상황에서 쉽지 않은 일이다. 일각에서는 국내 업체 간 경쟁으로 저가수주가 예상될 경우 금융기관이나 건설공제조합ㆍ무역보험공사에서 보증이나 보험을 거부하거나 수가를 올리는 방식으로 견제장치를 마련하는 방법도 거론된다.
전문가들은 기술력과 수익성이 전제된 해외 건설 진출 확대를 위해서는 근본적인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고 지적한다. 양적 팽창에 집착하기보다는 발주자 중심의 해외 건설시장에서 통할 수 있도록 국내 건설사의 체질을 개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국내 건설 관련 법ㆍ제도 등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혁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손영진 한양대 해외건설전문가 양성과정 교수는 "철저히 공급자 중심인 국내 건설시장에서 '나눠먹기' 식으로 영업해온 우리 업체는 공기 단축을 중시하는 소비자(발주자) 중심의 해외 건설시장에서 적응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엔지니어링 역량과 구매 경쟁력을 높이는 것 못지않게 시급한 것이 건설사의 뼈를 깎는 자기성찰과 국내 건설 관련 제도ㆍ시스템 개선"이라고 말했다.
해외 건설시장은 융ㆍ복합화에 초점을 맞춰 발주자에게 최적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형태로 바뀐지 오래지만 국내 건설업계는 철저한 업역 구분 때문에 대형 건설사라고 할지라도 공사 프로젝트 전반에 걸친 경쟁력을 갖추기 힘든 상황이다. 설계는 건축사만 할 수 있고 시공 역시 원도급과 하도급으로 분리돼 있으며 사업관리(CM)의 참여 범위도 제한돼 있다 보니 공정별로 최적의 성능이 발휘되기 어려운 구조다.
이 연구위원은 "정부가 나서서 해외 건설 전문인력을 양성하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는데 이는 국내 룰이 해외에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면서 "우리나라 건설사가 해외에 나가 외국 건설사와 제대로 경쟁하려면 기술력과 조직체계의 혁신뿐 아니라 국내 제도와 관행을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별취재팀=박태준 차장, 성행경ㆍ박성호ㆍ신희철기자, 박홍용기자(싱가포르ㆍ베트남), 김상훈기자(UAEㆍ카타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