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부터 독일 하노버에서 열리고 있는 ‘세빗(CeBIT) 2007’의 제2전시장. 삼성전자ㆍ파나소닉ㆍ샤프 등 쟁쟁한 디스플레이 업체들이 LCDㆍPDP 제품들을 내놓았지만 유독 눈에 띄는 국가가 있었다. 바로 중국이다. 국내 기업의 두배를 웃도는 471개사가 대거 전시회에 참가한 중국은 디스플레이 부문에서 첨단 기술력을 과시하며 저가 브랜드의 이미지를 벗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중국 가전업체인 TTE의 마이클 창 마케팅 매니저는 “가격만 싼 제품이 아니라 기술력과 품질이 우수한 제품을 앞세워 유럽시장에서 정면승부를 걸겠다”며 “삼성ㆍLG 등 한국 기업들이 앞서가고 있지만 조만간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한 자신감을 보였다. 지난해부터 판가 하락으로 경쟁력이 약화된 국내 디스플레이 업계로서는 최근 무서운 속도로 치고 올라오는 중국의 저력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수익성 ‘빨간불’ 켜졌다=‘O.K. 목장의 결투.’ 지난해 하반기 미국시장에서 벌어진 평면TV시장의 가격전쟁을 빗댄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한해 동안 판매가격은 최고 75%나 급락했다. 마진이 줄어들다 보니 컴퓨USA 등 대형 유통업체들이 앞다퉈 매장을 절반이나 폐쇄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을 정도다. 패널과 완성품인 TVㆍ모니터, 노트북 등을 포함하면 국내 디스플레이 산업은 우리나라 수출의 40%가량을 차지할 정도로 핵심산업이다. 하지만 디스플레이 산업은 지난해부터 급속하게 수익성을 잃어가며 휘청거리고 있다. 실제 지난해 말 국내 디스플레이 업계는 줄줄이 적자를 기록했다. LG전자는 지난해 4ㆍ4분기에 PDP패널과 TV완제품을 생산하는 디지털 디스플레이 부문이 1,467억원의 영업적자를 낸 탓에 434억원의 영업적자를 기록했다. 2002년 회사분리 이후 분기별 영업적자를 기록한 것은 처음이다. 삼성SDI 역시 지난해 4ㆍ4분기에 영업이익이 191억원 적자로 반전됐다. LCD를 생산하는 LG필립스LCD는 지난해 최악의 해를 보냈다. 총 10조6,240억원의 매출을 올렸지만 무려 8,790억원에 달하는 영업적자를 기록한 것이다. 국내 디스플레이 업계 부진의 가장 큰 원인은 공급과잉에 따른 급격한 판가하락. 시장조사기관 디스플레이서치에 따르면 42인치 LCD패널 가격은 지난해 4월 880달러에서 올해 3월 562달러로 36%나 하락했다. 40~43인치 PDP패널은 지난해 1ㆍ4분기에 686달러에서 올해 1ㆍ4분기에는 499달러로 27%가량 떨어졌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브라운관을 급속도로 대체하고 있는 평판디스플레이(FPD)의 대중화를 위해서는 소비자들이 감당할 만한 수준까지의 가격하락은 어쩔 수 없는 현상으로 볼 수 있다”며 “결국 가격하락으로 인한 수익성 악화를 끝까지 버텨낼 수 있는 체력을 가진 기업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ㆍ대만 ‘한국을 이겨라’=국내 디스플레이 업계는 세계시장에서 일본과 대만의 거센 도전을 받고 있다. LCD시장에서는 우리나라와 대만이, PDP시장에서는 우리나라와 일본이 선두자리를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지난해 디스플레이 시장의 국가별 점유율을 보면 LCD에서는 한국이 44.3%, 대만이 42.4%를 차지했다. PDP에서는 한국이 52%, 일본이 48%를 점유해 2005년 12%포인트의 격차가 4%포인트로 크게 줄었다. 두 시장 모두 근소한 차이로 우리나라가 앞서고는 있지만 그야말로 살얼음판을 걷는 우위에 그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과 대만의 디스플레이 기업들은 한국을 잡기 위해 총공세를 펼치고 있다. ‘디스플레이 종주국’을 자랑하던 일본은 그동안 입었던 자존심의 상처를 회복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샤프전자는 올초 세계에서 최초로 50인치 LCD 생산설비인 8세대 라인을 가동하고 최근 52인치 LCD TV를 출시했다. 마쓰시타는 전세계 PDP업계의 투자 축소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세계 1위 자리를 내줄 수 없다”며 공격적 투자를 집행하고 있다. 반면 국내 업계는 삼성전자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기업들이 잇달아 투자를 유보했다. LG필립스LCD는 8세대 투자를 보류하기로 했으며 LG전자와 삼성SDI도 PDP생산라인에 대한 추가 투자에 대해 유보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미래도 낙관할 수 없다=국내 디스플레이업계가 걱정하는 것은 미래 전망도 극히 불투명하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가격하락이 좀처럼 멈추지 않을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시장조사기관인 아이서플라이는 연말까지 40인치 제품의 가격이 1,000달러 밑으로 떨어지고 27인치도 500달러선이 붕괴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특히 일본이 여전히 기술력에서 앞서 있다는 평가도 부담스럽긴 마찬가지다. 일본 NEC의 독일법인에서 근무하는 마인 그라프씨는 “일본 디스플레이 업체가 최근 FPD시장에서 한국 업체들에 밀려 고전한 것은 사실이지만 미래 기술에 있어서는 일본이 한발 더 앞서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일본이 그동안 쌓아놓은 막대한 유보자금을 실탄 삼아 만든 성과가 하나둘씩 신기술 개발로 결실을 맺고 있다는 주장이다. 최근 디스플레이 강국으로 급부상한 대만 역시 기술수준을 빠르게 향상시키면서 우리의 뒤를 바짝 쫓고 있다. 독일 최대 IT 유통업체인 미디어마트의 디스플레이 매니저인 로런 마그리트씨는 “프리미엄 제품에서는 여전히 삼성전자와 LG전자가 톱 클래스”라면서도 “하지만 최근 들어 중국ㆍ대만 업체들이 유사한 디자인과 기술에 가격을 낮춰 들어오고 있다”고 전했다. 국내 디스플레이업계가 최근의 가격하락 추세 둔화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마음을 놓지 못하는 것도 이처럼 국내외 시장환경이 갈수록 냉혹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 OLED·플렉시블 디스플레이…신기술로 차세대시장 잡는다
가격만으로 승부 거는 시대는 지나
디지털액자·PC내장 모니터등 각광
OLED는 삼성·LG가 세계1위 다퉈 최근 새로운 소비시장으로 떠오르고 있는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한 대형 전자매장. 지난 17일(현지시간) 기자가 찾은 이곳에는 삼성과 소니 등 글로벌 업체들의 다양한 TV제품들이 가격표를 붙인 채 선반 가득 쌓여 있었다. 제품 진열에 분주한 손길을 놀리던 게하르드 가히어 매니저는 "요즘 중국 TV도 점차 한국산과 엇비슷해지고 있다"며 "고객들은 이제 가격만으로 한국제품을 선택하지 않는다"고 시장 분위기를 전했다. 평면TV시장이 출혈경쟁으로 번지면서 국내 디스플레이 업계도 가격만으로 승부를 거는 시대는 지났다는 게 중론이다. 관건은 차세대 디스플레이시장의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신기술과 혁신제품으로 시장을 창출해야 한다는 얘기다. 이와 관련, 삼성전자가 최근 세계시장에 내놓은 디지털액자, PC를 내장한 모니터, LED광원 LCD 모니터, 인포메이션 디스플레이 등은 차세대 디스플레이로 각광받고 있다. 특히 디지털액자는 유럽 소비자에게 낯선 '가족ㆍ친구'라는 감성 마케팅을 기반으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며 미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국내 업체들은 미래기술 투자도 앞다퉈 진행하고 있다. 플렉시블(Flexible) 디스플레이의 경우 현재 삼성전자와 LG전자가 연구개발(R&D) 단계에서 시제품을 만들어내고 있지만 2~3년 내 구부릴 수 있는 LCD에 이어 10년 후에는 두루마리 디스플레이까지 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플렉시블 디스플레이는 오는 2015년까지 시장규모가 20억달러로 불어날 '황금시장'으로 불리고 있다.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역시 LCD와 PDP에 이은 한국 디스플레이 산업의 차세대 캐시카우로 꼽히고 있다. OLED는 LCDㆍPDP에 비해 응답속도가 빠르고 종이처럼 얇게 만들 수 있는데다 자연 그대로의 색감을 재연한다는 점에서 '꿈의 디스플레이'로 일컬어진다. OLED가 꿈의 디스플레이로 불리는 이유는 두께나 무게뿐만 아니라 화질에서도 현존하는 디스플레이 제품 중 가장 뛰어나기 때문이다. 직접 빛을 내기 때문에 LCD보다 1,000배가량 응답속도가 빠르다. 스포츠 등 빠른 화면도 흐려지거나 번지지 않고 자연스러운 영상을 구현한다. 현재 OLED 시장도 국내 업체들이 1, 2위를 다투고 있다. 지난 2004년 이후 3년째 삼성SDI가 시장 점유율에서 1위를 지키며 지난해에만도 1억달러의 매출을 달성했다. 삼성SDI는 올해 연간 2,000만개(휴대폰용 기준)의 능동형 OLED 생산라인 건설을 마무리짓고 본격적인 양산에 들어갈 계획이다. 우선 휴대폰용인 2.0인치부터 2.6인치까지 다양한 크기로 시장에 진입한 뒤 단계별로 DMBㆍPMPㆍ게임기 등으로 확대해 내년부터 연 1억개 이상을 생산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다. LG전자는 지난해 9,330만달러의 매출을 기록하며 2위에 올랐다. 지난해 상반기 2기 라인을 추가로 가동, 월 생산능력을 240만대로 2배 늘려놓은 상태다. LG필립스LCD는 2004년 20.1인치 능동형 OLED 시제품을 공개한 후 지난해 6월 2.2인치, 2.4인치급, 올 1월 3인치급 능동형 OLED를 선보이며 시장진입을 추진하고 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새로운 시장은 항상 리스크를 가질 수밖에 없다"며 "차세대 디스플레이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업체간의 불꽃 튀는 경쟁이 벌어질 것"이라고 밝혔다. /특별취재팀=정상범차장(팀장)·이규진·김현수·김상용기자 ssang@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