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4살에 바둑돌을 집어든 이래 54년 바둑 외길만 걸어온 ‘국수’ 조훈현 9단. 볼모지였던 한국 바둑을 세계 1위로 올려놓은 그가 16일 글로벌 기업 삼성의 사장들 앞에 섰다. 불안한 경기, 신성장동력에 대한 고민으로 착 가라앉은 삼성 사장단에 국수가 들려준 것은 “고수가 되기 전에 사람부터 되라”는 자못 평범한 한 마디였다.
조 9단은 이날 정기 수요일 사장단 협의회에 강연자로 나서 자신의 54년 바둑인생을 풀어놓았다. 특히 그는 스승인 세고에 겐사쿠가 남긴 “바둑에 앞서 사람이 되라”는 가르침을 평생의 지향점으로 삼았다고 회고하며 삼성 사장단에 감명을 줬다. 이와 관련해 세고에 선생의 문하생으로 있던 시절 선배들 손에 이끌려 내기 바둑을 뒀다가 한 달 남짓 ‘파문’을 당한 일화도 소개했다. 세고에 선생은 조훈현 국수가 만 10세에 대한해협을 건너 스승으로 모신 일본 바둑계의 전설이다. 조 9단은 세고에 선생과 핸디캡을 두고 하는 대국서 내리 세 번을 이겨 제자로 받아들여졌다고 말했다.
조 9단은 자신의 바둑 인생을 정리하며 강연 말미에 “‘사람이 되려면, 사람을 배워라’라는 것이 바둑정신이라 생각한다”며 “사람이 되려면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가장 먼저”라고 강조했다. 강연을 들은 삼성 계열사의 한 사장은 “평범하지만 요즘 같은 시기에 큰 울림을 주는 한마디였다”고 소감을 말했다.
조 9단에 따르면 그가 한국으로 돌아온 뒤 세고에 선생이 그를 찾은 일이 있었는데 2박3일을 머물면서 오로지 바둑만 두고 바둑 얘기만 해 스승을 모시고 한국 관광을 기대했던 제자를 아쉽게 했다고 한다. 당시 세고에 선생이 한국을 떠나며 “(조 9단이) 문하에 들어온 지 10년이 지나 바둑이 썩지는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그렇진 않아보였다”고 말했다는 게 조 9단이 전하는 스승의 일화다.
조 9단은 제자로서 끝내 자신이 갖고 있던 타이틀을 모두 빼앗아버린 이창호 9단에 대해서도 말했다. 그는 “바둑을 두면 형세에 따라 표정이나 자세에서 내면이 나타나는데 이 9단은 어린 나이에 바둑을 두면서도 상대방이 내면을 읽을 수 없을 정도로 침착했다”며 “그런 면에서는 나보다 한 수 위”라고 평가했다.
한편 조 9단은 1980년대부터 국내 기전을 휩쓸며 명성을 날렸다. 1989년 9월에는 세계 프로바둑선수권 대회인 제1회 응창기배에 나가 중국의 고수 녜웨이핑을 누르고 우승을 차지하며 바둑의 ‘변방’이던 한국을 ‘중심’으로 끌어올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9단처럼 세계적으로 명성을 쌓은 적지 않은 기사들이 조 9단의 제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