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8년 5월13일, 파리 곳곳의 저택 유리창이 돌팔매에 깨졌다. 공격 받은 측은 국왕 루이14세(당시 10세)의 섭정인 모후와 재상 마자랭 세력. 권력에 대한 공공연한 저항이 시작된 것이다. 모후는 골머리를 앓았다. 돌을 든 자들이 파리고등법원과 관리들이었기 때문이다.
법관들은 외국인(이탈리아 태생) 재상 마자랭의 독재와 월권을 저항의 명분으로 삼았으나 도화선은 세금이었다. 30년전쟁에 참전하느라 비어버린 국고를 채우고 어린 국왕의 권력기반을 다진다며 면세 대상이던 법관들에게 직접세를 과세하자 쌓였던 증오가 터졌다. 관리들은 마자랭이 5만여개의 새로운 관직을 만들어 파는 통에 관직 가격이 떨어진 데 불만을 품었다.
법원은 결국 새로운 약속을 얻어냈다. 파리에서 탈출해 반격의 기회를 엿보던 국왕 세력은 영국 찰스1세의 처형 소식이 전해진 직후 최고법원에 대한 과세동의권 부여, 관직신설 억제 등의 개혁안을 1946년 3월 받아들였다. 법관들은 제자리로 돌아갔다.
어린이들의 돌팔매 도구(Fronde)로 돌을 던졌다고 해서 프롱드의 난으로 불린 내전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650년 초 또다시 마자랭의 저택 유리창이 프롱드로 깨져나갔다. 2차 프롱드 반란의 주역은 고위 귀족층. 재상 마자랭의 퇴진을 요구한 귀족들의 저항은 내전에 지친 시민들의 외면 속에 1653년 국왕의 승리로 싱겁게 끝났다.
반란과 피난에 몸서리쳤던 루이14세는 어떤 신하도 믿지 않고 국정을 도맡아 절대왕권을 구축하며 화려한 베르사유 궁전을 지었다. 귀족 최후의 저항이자 시민계급 최초의 혁명이었던 프롱드의 반란은 단순 화해와 진압으로 끝났을까. 그렇지 않다. 프롱드 반란이 뿌린 씨앗은 140여년이 지난 뒤 프랑스 대혁명으로 피어나고 근대를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