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년 만에 다시 폴 크루그먼 미국 프리스턴대 교수의 '경고'가 주목을 받고 있다. 지난 1994년 '아시아 경제 기적의 미신'이라는 보고서인데, 당시 크루그먼 교수는 고속성장한 아시아 국가는 인구가 줄고 자본투입량도 한계에 봉착하면서 성장 신화는 막을 내릴 것이라고 분석했다. 아시아의 성장은 인구가 급격히 팽창해 노동공급이 늘어나고 황무지에 공장을 건립하는 등자본이 대량 투입돼 경제성장률이 고공행진하는 것일 뿐 생산성은 높지 않다고 지적했다. 성장의 한계가 있다는 얘기다. 그의 주장은 1997년 외환위기로 입증됐고 2015년 다시 현실이 되고 있다. 노동과 자본 투입량이 썰물처럼 빠지자 우리나라의 잠재성장률이 급락하고 있다. 성장의 힘을 보여주는 잠재성장률은 3% 중반에 불과하다. 자본, 노동 등의 생산요소를 물가 상승을 유발하지 않는 범위에서 완전 가동해도 기껏해야 3%, 0%대 성장하는 데 그친다는 의미다. 최근 4년간 2014년에만 잠재성장률을 넘어섰을 정도다. 잠재성장률을 넘어서는 실질성장률 달성도 어렵다. 성장의 힘이 약해졌다는 얘기다.
◇한계 드러낸 인구 주도형 성장=현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일본의 잠재성장률은 자산 버블이 터지기 전인 1980년대 4.5%에 달했다. 하지만 1990년대 1.6%로 뚝 떨어졌고 2000년대에는 0.8%로 반토막 났다. 최근에도 0.5~1%선에 불과하다. 우리도 비슷한 전철을 밟고 있다. 1980년대 잠재성장률은 10%에 달했지만 2000년대 4.5%로 하락한 뒤 현재는 3% 중반으로 내려앉았다. 가장 큰 원인은 저출산에 따른 노동력 감소다. 잠재성장률은 노동과 자본 투입량, 투입된 노동과 자본의 생산성(총요소생산성·TFP) 등 3대 축을 합쳐 구한다. 우리 노동 투입량의 잠재성장률 기여도는 1980년대 4.4%포인트에서 2000년대 1%포인트로 급락했다. 일본도 1980년대 0.6%포인트에서 1990년대 -0.3%포인트로 오히려 잠재성장률을 깎아먹었으며 2000년대에도 이를 유지하고 있다.
◇투자 안 하는 일본…따라가는 한국=잠재성장률의 또 다른 축인 자본투입량도 줄고 있다. 일본 경제는 1950년부터 1990년까지 오일쇼크가 발생했던 1970년대를 빼고 초고속 성장했다. 일명 '황금의 30년'이다. 당시 전후 초토화된 생산기지를 재건하느라 투자는 급증했고 '저축의 왕국'답게 국민들의 저축량도 탄탄해 자본조달 비용도 하락했다.
하지만 1990년대부터 상황은 뒤집어진다. 기업들의 경기전망이 비관적으로 돌아서면서 투자는 급감했다. 일본 내각부에 따르면 기업들의 기대성장률(3년 후)은 1989년 3.8%였으나 1990년대 말에는 0%대까지 하락했다. 전영수 한양대 국제대학원 특임교수는 "경기부양을 위한 초저금리로 가계 저축률이 하락하면서 기업들의 자본조달 비용이 올라갔고 결과적으로 자본 투입량도 줄어들었다"고 설명했다. 자본투입의 잠재성장률 기여도는 1980년대 1.8%포인트에서 2000년대 0.8%포인트로 줄었다.
한국 역시 비슷한 조짐을 보이고 있다. 자본투입의 기여도가 1998~2008년 2%포인트에서 2009~2013년 1.3%포인트로 떨어졌다. 기업들의 체감경기도 바닥이어서 제조업의 기업경기실사지수(BSI)는 지난해 12월 73으로 4년6개월째 기준선인 100을 밑돌았다. 1988년 24.7%로 정점을 찍은 가계 순저축률도 지난해 4.5%로 떨어졌다. 세계 최하위다. 모두 기업들의 투자를 방해하는 요소들이다.
◇생산성도 급락=노동·자본 투입량의 공백을 경제 생산성으로 메워야 하지만 한일 모두 이에 실패하고 있다. 아시아개발은행(ADB)은 '은행 위기와 일본화' 보고서에서 일본은 과잉규제와 경제적 경직성, 고령화로 TFP가 하락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일본은 기술력은 세계 최고 수준임에도 1980년대 TFP의 잠재성장률 기여도가 2%포인트에서 2000년대 0.6%포인트로 쪼그라들었다. 우리 역시 같은 전철을 밟고 있다. 1998년부터 2008년까지 TFP의 잠재성장률 기여도는 2.7%포인트에서 2009~2013년 1.6%포인트로 급감했다. 규제와 경제적 경직성이 계속되는 탓이다. 자유경제연구원에 따르면 2012년 현재 시장규제 부문 우리나라의 경제자유지수는 10점 만점에 6.9점으로 152개국 중 90위에 머물렀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고령화로 노동생산성도 세계 최저다. 시간당 노동생산성은 구매력평가지수(PPP)로 30.4달러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 회원국 중 28위다. 미국(65.1달러) 독일(59.2달러)보다 한참 떨어진다. 전 교수는 "노동·자본 투입량이 이미 줄거나 감소하기 시작했고 TFP도 단기간에 끌어올리기 쉽지 않아 과거와 같은 잠재성장률 4~5%대로 복귀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진단했다. 주원 현대연 수석연구위원도 "한국의 잠재성장률은 외환·금융위기 등 위기를 거치면 항상 급락했다"며 "외부 충격의 안전판인 내수가 취약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앞으로 위기가 닥치면 성장여력은 계속해서 낮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특별취재팀
팀장:이철균 경제부 차장 fusioncj@sed.co.kr 김상훈·조민규·구경우·이태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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