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이 없어 먹거리 놓치는 한국 IB
유럽 위기로 PF시장 기회 열렸는데 법 개정 늦어져 그림의 떡"연내 자본시장법 개정안 반드시 국회 통과시켜야"자기자본 3조원 투자처 못찾아 비상
김홍길기자 what@sed.co.kr
"유럽 재정위기 이후 해외 프로젝트파이낸싱(PF)에 참여해달라는 요청이 쇄도하고 있지만 법적 근거가 없어 참여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국내의 한 대형 증권사 투자은행(IB) 담당 임원은 요즘 답답한 마음에 연일 한숨만 내쉬고 있다. 유럽 재정위기로 유럽계 IB들의 돈줄이 막히면서 국내 증권사들로서는 글로벌 PF시장에 참여할 좋은 기회를 맞았지만 자본시장법 개정이 늦어지면서 관련사업을 할 수 없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19일 IB 업계에 따르면 그동안 글로벌 PF시장의 큰 손으로 군림했던 유럽계 IB들이 최근 유럽 위기로 사업참여를 포기하는 사례가 늘어나면서 대체 자금줄을 찾는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이 때문에 국내 업체들의 해외 프로젝트 수주시 자금주선 역할을 해온 수출입은행이 국내 은행과 증권사ㆍ보험사 등을 상대로 프로젝트 참여를 독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증권사의 경우 사업에 참여하고 싶어도 관련법이 없어 참여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한 증권사 IB 임원은 "수출입은행이 프로젝트 자금주선에 참여해달라고 요청은 하지만 지난 국회에서 대형 IB 도입을 골자로 한 자본시장법 개정안이 통과되지 못하고 폐기됨에 따라 증권사로서는 해외 PF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이 막혀버렸다"고 말했다.
해외 PF사업을 하려면 특수목적회사(SPC)를 설립해야 하고 여기에 자본금을 증액하는 과정을 거치는데 현행법상으로 은행들은 브리지론 형태로 자본을 댈 수 있지만 증권사들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이에 따라 최근 유럽계 IB들의 위축으로 해외 PF시장이 무주공산이 된 상태지만 국내 증권사들로서는 군침만 흘릴 뿐 사업에 참여할 수가 없다.
한 IB업계 관계자는 "해외 대규모 자원ㆍ플랜트 프로젝트의 경우 금융산업의 새로운 먹거리가 될 수 있는데 법적 뒷받침이 안 돼 스스로 기회를 걷어차는 상황"이라며 "글로벌 IB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트렉레코드(이행실적)가 절실한데 유럽계 IB가 위축된 지금이 가장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법적 장치 마련이 늦어지면서 지난해 자기자본을 대거 늘린 국내 증권사들로서는 난감한 상황에 처해 있다. 지난해 KDB대우증권 1조1,200억원, 우리투자증권 6,300억원, 삼성증권 4,000억원, 한국투자증권 7,300억원, 현대증권은 5,600억원을 증자했다. 이는 대형 IB의 요건인 자기자본 3조원을 맞추기 위해서다. 하지만 18대 국회에서 자본시장법 개정안이 끝내 통과되지 못하면서 6개월이 넘도록 대규모 증자자금을 활용할 만한 투자처를 찾지 못하고 있다. 손미지 신한금융투자 연구원은 "국내 증권사들이 증자를 통해 확보한 자금의 상당 부분을 채권투자 등에 활용하는 데 그쳐 자기자본이익률(ROE)이 떨어지는 문제점을 노출하고 있다"고 전했다.
업계에서는 자기자본이 4조원에 육박하는 KDB대우증권의 올해 ROE가 4%대로 급락할 것으로 전망했다. 지난해 ROE는 8.96%였다. 다른 증권사들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증자대금을 대부분 해외법인 증자나 유동성 공급 자금, 헤지펀드 투자, 단기차입금 상환 등 정통적 투자은행의 개념과는 거리가 먼 곳에 쓰고 있다.
원 구성 지연과 연말 대통령선거 일정 등을 감안하면 19대 국회에서도 자본시장법 통과는 상당한 시일이 걸릴 수밖에 없어 국내 대형 증권사들로서는 글로벌 PF시장 참여를 당분간 기약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정부는 18대 국회에서 이루지 못했던 자본시장법 개정에 다시 나서고 있다. 대형IB 도입 등을 골자로 한 자본시장법 개정안은 이날 국무회의를 통과했다. 금융위 관계자는 "19대 국회 원 구성 이후 바로 논의될 수 있도록 이달 중 국회에 제출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국회에 제출돼도 대선일정 등과 맞물려 언제 통과될지는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한 대형 증권사 임원은 "개정안의 국회 통과가 늦어질수록 대형사와 중소형사가 국내의 좁은 시장에서 답답한 경쟁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대형 증권사에는 IB면허를 줘서 글로벌시장에서 새로운 수익모델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고 말했다. 박종수 금융투자협회장도 최근 "자본시장법 개정안을 올해 안에 반드시 국회에서 통과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