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일이든 지나고 나면 추억이 된다. 즐거운 일이든 슬픈 일이든 때로는 고통스러운 일이라 할지라도 당시의 그 감정은 지워진 채 한 장의 그림으로 남게 된다. 1972년 뮌헨올림픽예술단 50명과 함께 떠난 4개월간의 대장정은 필자에게는 힘들었지만 아름다운 추억으로 기억되고 있다. 뮌헨올림픽에서 대한민국은 상당히 부진한 성적을 거뒀지만 뉴욕타임스 등 세계 유수의 언론이 대대적으로 눈부신 예술단의 활약을 보도했다. 해외여행이라는 단어도 익숙하지 않았던 시절에 아시아의 작은 나라에서 온 예술가들이 장벽을 뛰어넘는 교감을 이뤄낸 데는 분명 누군가의 탁월한 예술성과 아이디어가 꼭 있기 마련이다. 필자가 아직 당시를 생각하면 '박범훈'이라는 이름 세 글자가 먼저 떠오르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예술단이 아프리카를 거쳐 마지막으로 동남아시아 공연 일정만을 남겨뒀을 때, 예술단 단원(피리연주자)이었던 박범훈이 "공연을 마무리할 때 각 나라 민요를 배워 관객과 함께 부르는 시간을 마련하자"는 제안을 했다. 단원들은 모두 오랜 기간 여행에 지쳤지만 박범훈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발음도 잘되지 않는 낯선 말을 외며 그야말로 스파르타 식으로 밤을 지새워가며 연습하고 무대에 올랐다. 이런 열정 때문이었을까. 공연이 끝난 후에도 모두가 얼싸안고 그 나라 민요를 부르는 등 민족을 뛰어넘어 한마음이 되는 화합의 장이 펼쳐졌다.
4개월의 일정을 모두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자 이미 동남아시아에서 예술단이 각국 민요를 배워 합창하는 등 성공적으로 공연을 마쳤다는 보고가 정부 부처에 들어가 있었다. 정부에서는 당시 김종필 국무총리의 건의로 국악인 김소희·박귀희·한영숙·송범·강선영·김문숙 등 50명 예술단 전원에게 훈장을 줬는데 현재의 국립무용단의 전신인 한국민속예술단의 이러한 업적은 당시 공연사상 유례가 없던 파격적인 일이었으니 대단한 영광이 아닐 수 없었다.
근자에 화제가 된 미국의 배우 로버트 드니로의 뉴욕대 졸업식 축사의 전문 중 "예술 분야에서 '열정'이라는 것은 '이성'을 이깁니다"라는 문장이 있었다. 필자의 추억 속 박범훈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그런 그에게 어째서 지금과 같은 시련(중앙대에 특혜를 주고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이 닥쳐왔는지 박범훈의 빛나는 열정의 면면을 봐온 필자로서는 도무지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일이다. 극단 미추 대표인 손진책 연출가가 '예술가로서의 박범훈'을 돌려달라는 의미에서 구명운동을 시작한 것도 필자와 같은 마음에서 출발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고난의 시대에 태어나 태생적으로 국악을 익히며 이뤄낸 그의 수많은 예술적 업적이 이번 사건으로 희석되는 게 아닌가 싶어 안타깝다. 구속 수감 중인 박범훈이 이루고자 했던 '꿈'이 결코 지금의 모습이 아닐 것이라는 확신이 드는 것도 국악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척박하기만 했던 그 시절, 그의 순수했던 열정이 보여줬던 기쁨과 감동이 아직 필자의 뇌리에 가장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