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로터리] 부유한 노예

오늘날 우리가 처한 시대적 상황을 가리켜 흔히들 세계화ㆍ개방화ㆍ지식정보화 시대라고 말하고는 한다. 처음에는 낯설기만 했던 이런 말들이 어느새 보통 명사화해 이제는 누구에게나 친숙해져버린 시대가 됐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을 통해 시간과 공간의 제약 없이 가장 값싸고 품질 좋은 물건을 구입하고 있다. 남녀노소 구분 없이 구매자로서 우리는 한마디로 ‘소비자 천국’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불과 10여년 전만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다. 반면, 모든 기업들은 소비자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떻게든 가격을 낮추고 품질은 높여야 하는 처지에 놓였고 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 또한 이같이 절박한 상황에 처한 기업의 요구에 발맞춰 품질향상, 원가절감, 생산성 향상을 위해 일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다. 요컨대 세계화ㆍ개방화ㆍ지식정보화 시대를 맞아 소비자로서는 선택의 폭이 넓어졌지만 기업가와 노동자로서는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지 않으면 안되는 각박한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한편으로는 부유하게, 한편으로는 노예처럼 살아가야 하는 오늘날의 우리의 처지를 가리켜 클린턴 행정부에서 초대 농림부 장관을 지냈던 로버트 라이시는 ‘부유한 노예’라고 표현했다. 지금 우리가 처한 시대적 상황은 우리에게 근본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100여년 전 구한말 상황은 처절하게 변화하지 않으면 생존하기 어려웠다는 점에서 지금의 시대상황과 너무나 유사하다. 구한말 수구파들은 ‘두가단발부단’(頭可斷髮不斷), 머리는 자를 수 있어도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고 외치며 외국 문물에 대해 위정척사(衛正斥邪)로 맞섰다. 물밀듯이 몰려드는 외세와 외국문물 앞에서 조국을 지키겠다고 나선 그 기개는 평가를 해줘야겠지만 조선의 국력ㆍ정치체제ㆍ생산방식ㆍ신분제도를 유지한 채 격동의 시대를 헤쳐나갈 수 없었다는 점에서 수구파들의 시대상황에 대한 인식은 바르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아직까지도 변화와 개혁이라는 시대적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과거에 쌓은 지식과 경험만으로 세상을 재단하려는 사람들을 볼 때면 대단히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구한말 우리를 위협한 것은 제국주의 열강이었지만 국경과 시간을 초월한 세계화ㆍ개방화ㆍ지식정보화 시대에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 것은 선진국도, 다국적 기업도, 대기업도 아닌, 소비자로서의 우리 자신, 바로 전세계인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을 둘러싸고 찬반 의견이 극명하게 엇갈리고 있다. 우리 국민 모두가 변화와 개혁의 주체로서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니라 합리성과 객관성이 뒷받침된 치열한 논쟁을 통해 생산적인 국민적 합의를 도출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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