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시장 "정부정책 못믿겠다"구조조정 무원칙에 '개혁 피로증후군'까지
금융시장이 정부를 믿지 못한다. 정부에 대한 시장의 신뢰상실이 되풀이되면서 자금의 선순환은 사라지고 기업위기설을 확대재생산시키고 있다.
특히 원칙을 벗어난 정책과 연속된 「대증요법」속에서 금융시장의 지렛대 역할을 해야하는 일부 부처마저 적극적 대책마련에 미온적이라는 비판이다.
금융구조조정 일정이 일시에 몰린 가운데 정부의 구조조정 조급증도 금융시장내 또다른 마찰적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충분치 못한 실탄(공적자금)도 구조조정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을 증폭시키고 있다. 최근에는 경제부처에 대한 개각설이 또다시 시장에 유포돼 정책당국자들의 신뢰상실을 부추기는 조짐이다.
◇원칙을 벗어난 금융정책= 최근 일련의 정책 집행과정은 2년넘게 정부가 지켜온 구조조정의 원칙을 무색케 한다. 대표적 예가 한국종금 처리과정.
종전 종금사 처리과정은 금융기관이 유동성 위기에 처했을때 영업정지에 들어가고, 정상화 가능성에 따라 회생여부를 판가름하는 순으로 진행됐다. 정부는 그러나 한국종금만은 유독 시장안정이라는 명목아래 「부실우려금융기관」이라는 애매한 문구를 동원, 공적자금을 투입했다. 구조조정의 원칙중 하나인 「대주주 무한책임론」도 사실상 붕괴됐다.
대주주인 하나은행은 유한책임에 머무른채 『시장을 볼모로』(금감위 관계자) 버티기를 계속했다. 원칙을 벗어난 정책은 투신사에 대한 비과세상품 허용에도 드러났다. 과세형평성 문제가 야기될 것을 뻔히 알면서 시장안정을 명분으로 유동성 확보대책을 내놓은 것.
민간연구소 관계자는 『위기발생 이전 정부가 미리 예측, 시장의 분위기를 이끌어가는게 정상적인 금융시스템』이라며 『그러나 현 상황은 정부가 시장에 볼모로 잡혀 끌려다니는 형국』이라고 지적했다.
◇금융기관 정부를 못믿는다= 투신권은 정부의 대우 담보CP(4조 규모) 80% 보장방침에 불만이 가득하다. 대우 자금지원이 사실상 「정부강제」에 의한 것이었음에도 불구, 이제와 80% 운운하는 것에 수긍할 수 없다는 자세. 한 투신사 임원은 『제2의 대우가 터졌을때 과연 누가 정부를 믿고 지원에 나설 수 있겠느냐』며 정부 신뢰성 부족을 정면으로 성토했다.
금융구조조정의 속도 문제도 마찬가지. 금감위 고위 관계자는 『정부가 구조조정의 딜레마에 빠져있는게 사실』이라며 『이는 시장에 마찰적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인정했다.
장기간 소요되는 기업구조조정작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또다시 2차 금융구조조정을 속전속결로 처리하려다 보니 구조조정의 두 바퀴(기업·금융)가 충돌하고 있다는 것. 특히 자금공급의 두 축인 은행과 투신에 대한 구조조정 시기가 6월~7월에 동시에 맞물려, 자금의 선순환 기능을 잃어버리고 있다는게 관변 연구소 연구위원의 지적이다.
금융기관들은 거듭된 구조조정의 통로속에서 몸사리기에 나서고, 걸핏하면 터져나오는 정부의 문책방침에 스스로 자금중개기능을 위축시키고 있다. 시중은행 임원은 『정부의 거듭된 구조조정 밀어부치기에 극심한 피로증후군에 빠져있다』며 『기업들이 유동성 부족에 시달리고 있는 판국에 금융기관의 클린화를 외치는 것 자체가 모순 아니냐』고 반문했다.
이번 자금시장 안정대책에서도 정책에 대한 신뢰부족은 드러났다. 이번 대책은 지난해 채권안정기금과 마찬가지로 금융기관에 대한 강제동원이 불가피하고, 이는 또다른 관치금융으로 흐를 가능성도 높다.
자칫 이번정책이 단순 수요기반 확충이라는 대증요법에 머무른채 「기업부실→금융기관부실→자금경색」의 악순환고리만 심화시킬 우려도 제기된다. 시장참여자간 신뢰회복과 부실기업에 대한 정확한 정보공개(기업 클린화)를 통해 옥석을 가리고 경우에 따라 과감한 퇴출 결단이 요구된다는 지적이다.
◇정부당국도 개혁피로증후군= 남북정상회담의 축배분위기가 한창이던때, 중견기업들은 자금시장의 한파에 생사의 기로에 서야했다. 그러나 이상하리만치 금융시장을 책임진 금감위 목소리는 종적을 감추었다.
이용근(李容根)금감위원장은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채 「은둔생활」을 이어갔다. 시장참여자들은 시장안정에 나서는 위원장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러나 묘하게도 시장안정대책은 이헌재(李憲宰)재경부장관의 정상회담 설명회 자리서 공개됐다. 이런 상황속에서 시장은 또다시 개각설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금융시장은 당장 「개혁피로증후군」이 「개혁 역풍」으로 바뀔지 모른다는 우려를 나타냈다. 학계의 한 소장파 교수는 『시장이 흔들릴수록 경제관료들이 표표히 정책중심(원칙)을 지키는 자세를 가다듬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영기기자 YGKIM@SED.CO.KR입력시간 2000/06/18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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