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석학에게 듣는다] 2.에드워드 M 그래험
"勞·使·政 구조조정 접점 찾아내야"
한국 경제가 2000년 막바지에 다시 불확실한 상황에 놓이면서 자칫 제2의 위기가 닥칠지 모른다는 우려가 팽배해있다. 이 같은 상황에 다시 놓이게 된 것은 한국이 위기 상황을 맞은지 3년이 지나도록 구조조정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구조조정의 주된 목적은 자본 및 노동의 낮은 생산성을 높이는 것이었다. 자본과 노동면에서의 낮은 생산성은 97년 위기 발생 이전부터 한국 경제의 최대 취약점으로 지적돼 왔다.
이를 개선하기 위한 구조조정 없이는 한국인들의 생활수준이 점차 나아지길 결코 기대할 수 없다. 임금은 계속 오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한국의 우량기업들도 생산성 제고 없이는 수익을 올릴 수 없기 때문이다. 재벌의 구조조정 역시 바로 생산성 증가를 위해 필요한 것이다.
한국의 경우 여전히 상당 부문에서 설비 과잉상태가 남아있다. 결국 한국기업 대부분이 '다운사이징'을 해야 하며, 나아가 불가피하게 인력을 줄여야 할 처지다. 한국의 노조는 그러나 이러한 현실을 잘 알면서도 여전히 구조조정 반대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사실 현재와 같은 상황은 지난 98년 불황이 정점에 달하기 전에도 나타났었다. 당시 재벌 계열사들과 노조가 치열하게 대치했고, 이 같은 대치상황은 회사들이 전에 발표했던 인력감축방안을 철회하고서야 겨우 해결되었다.
그러나 이는 구조조정이라는 절실한 문제를 해결한 게 아니라 잠시 미룬 데 불과하다는 점에서 무의미한 사태 해결이었고, 한국경제는 물론 노동자 자신을 위해서도 불행한 일이었다. 2000년 여름에 현대가 겪은 유동성위기가 상당 부분 많은 계열사의 과잉 인력 때문이었다는 점은 명백한 사실이다.
따라서 아직도 한국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장래를 위해 다운사이징이 필요하다는데 대해 노조, 회사, 정부가 합의점을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노조 지도부가 강경한 입장을 버리지 않을 경우 한국도 지난 70년대 영국이 경험했던 고실업, 고물가의 스태그플레이션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불행하게도 현재 한국의 노조 지도자들은 당시 영국 노조지도부처럼 강경한 입장만을 고수하고 있는 반면 정부에게선 당시 위기를 극복한 대처 여사가 휘둘렀던 철권(鐵拳)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대처 이전의 영국에서 노동투쟁은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았고, 이로 인해 모든 사람, 특히 노동자들 자신까지 피해를 입었던 상황을 한국 정부와 노동 지도자들은 명심해야만 한다. 또 노조의 과도한 요구에 정면으로 맞선 대처가 오늘날 영국을 유럽의 가라앉는 나라가 아니라 다시 떠오르는 나라로 자리잡게 만든 결정적인 전환점의 설계자로 인정받고 있다는 점을 한국 정부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김대중 대통령의 과제는 노조 지도자들에게 현재의 고용상태를 계속 유지하기 위한 투쟁이 아무에게도, 심지어 노동자들 자신에게도 득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설득하는 것이다.
인력감축이란 어쩔 수 없이 필요한 것이고 보다 중요한 과제는 없어지는 일자리만큼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해내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이 같은 현실을 인정하도록 설득하는데 한국경제의 장래가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은 물론 구조조정의 필요성을 국민들에게 인식시키는 것보다 훨씬 많다. 구조조정과정에서 아무에게도 고통이 뒤따르지 않도록 만드는 것은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특히 구조조정과정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부분은 아무런 잘못 없이 직장에서 쫓겨나는 사람들이 적지않게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 같은 일은 80년대 영국이나 미국에서도 일어났다. 하지만 당시의 고통은 두 나라가 90년대 들어 번영을 구가하기 위한 필요조건이었다.
실제로 두 나라에서 해고되었던 대부분 노동자들이 결국 재취업에 성공했고, 새로운 일자리가 종전보다 훨씬 좋은 조건이었던 경우가 더 많았다. 안타깝게도 한국에서도 많은 사람이 구조조정기간동안 과도기적인 실업에 고통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이같은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한 사회 안전망이 어떤 형태로든 필요하다. 사회 안전망은 실업보험에 의해 충당되는 실업수당의 형태로 이뤄지는 게 가장 이상적일 것이다.
그러나 한국은 현재 실업보험을 갖추지 못하고 있고, 당장 이 같은 제도를 만들만한 시간적 여유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로선 실업수당을 정부재정이나 국채발행을 통해 충당하는 방안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재정지출이나 국채발행 모두 취업자들이 실업자들의 소득 유지에 기여하게 된다는 점에서는 같다. 하지만 국채방식의 경우 대부분 부담이 장래의 소득으로 이전된다는 점이 크게 다르다. 정부재정에서 충당할 경우에는 모든 부담이 당장 나타나게 된다. 이런 방식으로 인력감축에 따른 고통을 온 국민이 골고루 분담함으로써 구조조정의 비용을 해고당하는 불운한 사람들에게만 떠넘기는 일을 피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현재 한국 정부는 인력감축에 대한 공적지원제도를 갖고 있지만 이는 그다지 생산성이 높지 않은 비경제적인 기업들이 보다 많은 사람을 고용할 수 있도록 국영은행을 통해 대출해주는 방식에 불과하다. 많은 경우(민간 연구소에서는 한국 기업의 30% 정도가 이에 해당된다고 보고 있다) 이 대출들은 상환될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 않으며 결국 이 제도는 정부가 고용을 유지하기 위해 지원해주는 보조금에 불과한 셈이다.
보조금이란 게 사실 보다 생산적인 기업과 노동자들이 비생산적인 기업과 노동자에게 지원해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 시스템의 문제점은 비생산적인 기업이 생산적인 기업으로 변화할 계기를 마련할 필요가 없게 된다는 점이다.
한국 정부가 지금부터라도 해야 할 일은 구조조정의 진행에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서 실직자들을 과도한 고통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사회 안전망을 구축하는 것이다. 이 같은 작업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현 정부가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과제다.
■그래험 박사 누구인가
에드워드 M 그래험 박사는 80년대 중반부터 아시아 경제에 초점을 맞춰온 미국내 유명한 한국통 가운데 한명이다.
하버드대학에서 경영학석사(MBA)와 경제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그래험 박사는 대학과 국제기구를 오가며 국제투자와 다국적 기업을 중점적으로 연구해 왔다.
그래험 박사는 특히 국제경제분야에서 주목받고 있는 중진 경제학자로 95년에 MIT(매사추세츠 공화대학)의 폴 크루그먼 교수와 함께 '미국의 외국인 직접투자'란 책을 펴내 학계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학위취득 후 MIT 교수를 거쳐 미 재무부에서 근무하면서 국제투자를 담당했던 그래험 박사는 이후 노스 캐롤라이나 대학 일본센터
연구원시절(83~88년)부터 아시아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00여편이 넘는 연구논문을 학술잡지에 게재할 정도로 활발한 연구활동을 벌이고 있는 그는 90년대중반 이후 '세계화(globalization)''국제 경쟁정책' 등에 초점을 맞춘 저서를 잇따라 내놓고 있다.
그래험 박사는 스탠포드대학, 버지니아대학, 존스홉킨스대학, 하버드대학 케네디스쿨 등에서 강의를 했으며 현재 세계무역기구(WTO), 국제통화기금(IMF),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유엔무역개발기구(UNCTAD) 등의 자문역을 맡고 있다.
지난 97년 1년동안 서울대학교 교환교수로 한국을 방문한 후 매년 한국을 찾고 있는 그래험 박사는 2000년 말 서울에 다녀간 후 노동문제의 해결이 한국 구조조정의 최대관건임을 실감했다며 서울경제신문에 특별기고를 보내왔다.
◆주요약력▦MIT 졸업 물리학 전공 ▦하버드대학 경제학박사 ▦74~79년 MIT 교수
▦ 79~83년 미 재부무 근무,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파견근무 ▦83~88년 노스캐롤라이나대학 교수, 일본센터 연구원 ▦89~90년 듀크대학 교수
◆주요 저서▦글로벌 경쟁정책(97: 공편) ▦로벌 기업과 정부(96) ▦미국의 외국인 직접투자(95:폴 크루그먼 MIT교수와 공저) ▦엉뚱한 적과의 싸움;反글로벌행동주위자와 국제 투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