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는 궁극적으로 소통입니다. 상상력과 창의력으로 만들어진 이야기가 다양한 방식으로 재창작되고 때로는 첨단기술과 합쳐져 우리 모두가 즐길 수 있는 문화 상품으로 탄생하는 겁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콘텐츠는 다시 소비자와 만나 더 많은 상상력과 창의력으로 진화하게 되는 거지요. 끊임 없이 소통하고 발전하는 콘텐츠야말로 대한민국의 미래를 책임질 창조경제의 핵심 키워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해 3월 우리나라 콘텐츠 산업의 메카인 한국콘텐츠진흥원 수장으로 취임했던 홍상표(56ㆍ사진) 원장에게 지난 15개월은 21세기를 상징하는 역동적인 산업의 잠재력을 온 몸으로 체감했던 뜻깊은 시간이었다. 30여년의 저널리스트 생활을 접고 청와대 홍보수석비서관이라는 중책을 맡았을 때도 느끼지 못했던 역동적인 변화의 현장을 절감하고 있는 셈이다.
◇신문을 통해 세상을 읽다=홍 원장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하루에 신문을 3~4개씩 읽고는 했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정치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신문을 통해 세상의 흐름을 읽었던 것. 어쩌면 이때부터 콘텐츠가 갖고 있는 엄청난 힘을 자신도 모르게 경험했을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서울로 유학 왔던 홍 원장의 신문 사랑은 그칠 줄 몰랐다.
"서대문 근처의 이모댁에서 하숙하면서 중앙일보ㆍ대한일보ㆍ동아일보 등 여러 신문을 모두 읽었어요. 오후에 가면 4부를 묶어 10원에 판매하던 시절이었거든요. 당시 버스 요금이 5원이었으니 적은 금액은 아니었지만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알고 있다는 게 무척이나 의미 있는 일로 여겨졌습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사건을 묻자 1972년 유신체제 선포를 떠올렸다. "우리 민족사의 진운을 영예롭게 개척해나가기 위한 중대한 결심을 발표하겠다"며 그해 10월 17일 오후7시를 기해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하는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했던 것이다. 당시 중3년생이었던 홍 원장에게 대통령의 유신 선언이 갖고 있는 의미를 해석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모든 신문이 '한국이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유신 체제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는 서울에 살고 있던 친척 어른을 찾아가 유신의 의미를 물었고 그에게서 제대로 된 답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1974년 12월 동아일보 백지광고 투쟁도 기억에 남는 한 장면으로 떠올렸다. "당시 정권에 비판적인 동아일보에 광고를 끊자 아예 지면을 백지로 내보낸 사건이었습니다. 고등학생이었던 저 자신도 백지 광고를 보면서 가슴 한 켠이 뭉클해지면서 정의감 같은 것이 솟아오르더군요. 그런 일련의 사건들이 제가 기자로서 꿈을 키우는 기폭제가 된 것 같습니다."
◇기자의 눈으로 세상을 읽다=홍 원장은 76학번이다. 1975년 5월 선포된 긴급조치 9호는 집회나 시위 또는 신문 방송 기타 통신에 의해 헌법을 부정하거나 폐지를 청원, 선포하는 행위를 금지할 뿐만 아니라 이 조치에 대한 비방행위조차 금지되던 시절이었다. 1979년 12월 7일 해제될 때까지 4년 동안 지속된 긴급조치 9호 시대는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최대 암흑기로 기록되고 있다.
한국외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한 홍 원장은 학과 수업보다는 대학신문을 제작하는 일에 몰두하며 기자의 꿈을 키워갔다. "당시에는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는 말도 못 쓰던 시절이었어요. 은유적으로 시대적 상황을 표현하는 것조차 검열을 당했으니 참으로 암울했던 시절이었지요. 중앙정보부의 지휘 하에 주간 교수가 검열을 했었는데 필화 사건을 두 번이나 일으킬 정도로 나름대로 저항을 하면서 기자로서 사명감을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입대한 후에는 정치적 사건에 휘말려 목숨을 잃을 뻔한 일도 겪는다. 1979년 7월 육군본부에 배치되면서 정승화 참모총장을 보좌하는 행정서기관을 맡기로 하고 면접까지 치렀다. 하지만 당시 시력이 나빠져 뿔테 안경을 썼던 홍 원장을 공관 관리 대장이 퇴짜를 놓으면서 보직이 바뀐 것. 결과적으로 안경이 홍 원장의 목숨을 구한 셈이었다.
"육군본부에서 근무하던 중에 10ㆍ26사태가 터졌습니다. 육본 앞에서 신군부 체포조 측과 교전이 벌어졌는데 그 와중에 참모총장을 보좌하던 비서관 한 명이 총에 맞아 죽었다고 하더군요. 만약 제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 당사자가 되었겠지요. 정말 운명의 장난이 아닐 수 없더군요."
1982년 복학한 홍 원장은 그 해 가을 연합통신(현재의 연합뉴스)에 입사한다. "일반 업체는 들어갈 생각도 안 했을 정도로 기자가 돼야겠다는 생각이 확고했어요. 미국 유학도 심각하게 고민했지만 현장에서 취재를 하고 싶은 욕구가 더 컸어요. 게다가 워낙 어릴 적부터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이 많았으니 '잡학사전'이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로 시사에는 자신이 있었고 글을 쓰는 것(논술시험)도 할만 하다고 생각했지요."
외신부ㆍ사회부ㆍ정치부 등에서 근무하던 홍 원장은 중대한 인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바로 보도전문채널인 YTN법인이 1993년 설립되면서 방송기자로 가라는 권유를 받은 것. "당시 사장이 향후 방송 시장의 전망이 밝다면서 YTN으로 이직을 권유했지만 처음부터 글쟁이로 살고 싶었던 저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제안이었지요. 몇 차례 고사하다가 결국 방송기자로 새 출발을 하게 됐습니다."
방송 미디어를 직접 접하면서 홍 원장은 영상 콘텐츠의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눈을 뜨게 된다.
◇콘텐츠, 창조 경제의 미래다=YTN에서 정치부 차장, 프라임뉴스 앵커, 보도국장, 상무이사 등 요직을 두루 거친 그는 2010년 청와대 홍보수석비서관이란 중책을 맡았다. 그리고 지난해 한국콘텐츠진흥원이라는 새로운 공간에서 둥지를 틀게 된다.
"어떻게 보면 제 삶을 통해 저 또한 콘텐츠를 창작하고 유통한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대표적인 콘텐츠인 뉴스를 만들고 보도하는 일을 30여년 해왔으니까요."
홍 원장은 우리 정부가 키워드로 내세우고 있는 창조 경제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콘텐츠 산업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창조경제는 인간의 상상력과 창의력이 첨단기술이나 산업과 융합, 상품화되면서 새로운 부가가치와 시장,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경제기반을 말합니다. 1970~1980년대가 제조업 기반의 산업경제, 1990년대가 IT 산업 기반의 지식경제였다면 이제는 경제 패러다임이 바뀌어 창조산업 기반의 창조경제 시대가 도래하고 있습니다. 창조경제 환경에서 가치의 원천은 상상력과 창의력과 같은 인간의 소프트파워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상상력과 창의력이 바로 콘텐츠 산업의 핵심가치이기도 하지요. 바로 이 지점에서 창조경제와 콘텐츠 산업이 만나는 것이며 창조산업의 대표적인 분야로 콘텐츠 산업을 육성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실제로 그동안 우리나라에 창조경제가 없었던 게 아닙니다. 각각의 분야에서 창조경제를 추진했던 것을 제대로 된 방향을 설정해 미래의 성장 동력으로 키워가자는 게 새 정부의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창조 경제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무엇인가. 홍 원장은 '일자리 창출'이라고 잘라 말한다. "콘텐츠진흥원은 각 장르별 콘텐츠의 생산을 지원하고 글로벌 시장을 개척하는 일을 합니다. 아울러 콘텐츠 생산에 필요한 기술 개발과 창의적인 인력 양성, 공정한 콘텐츠 생태계 조성 등에 힘을 집중하고 있어요. 이 모든 전략 목표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바로 일자리 창출입니다. 그것도 취업보다는 창업으로, 콘텐츠 산업이야말로 창의적인 젊은이들이 창업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시장입니다. 실제로 콘텐츠 산업의 고용유발계수는 12.0으로 반도체 4.9나 자동차 7.2보다 훨씬 높을 뿐 아니라 전체 종사자의 75%가 39세 이하입니다. 콘텐츠 산업이 여타 산업보다 청년 일자리 창출에 기여하고 있다는 점을 직시해야 합니다.
새 정부가 2017년까지 콘텐츠 산업 시장 규모를 120조원으로 키우고 100억달러 수출, 69만명 고용(일자리 8만 개 창출)을 목표로 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입니다."
홍 원장은 최근 개인적으로 가장 감동을 받은 콘텐츠로 조용필의 새 앨범을 꼽았다. "조용필의 신곡 '바운스(Bounce)'는 그의 시대를 지나온 우리에게도, 요즘 젊은 친구들에게도 호응 받는 명품 콘텐츠가 됐습니다. 사소하지만 남들과 다른 변화를 끊임 없이 추구한 창의성이 명품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비결이라는 사실을 모두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 홍상표 원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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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콘텐츠공제조합 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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