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5월14일] 체코군단

1818년 5월14일, 러시아 중부 첼랴빈스크시. 체코군단이 총을 들었다. 체코군단은 오스트리아에 강제 징집돼 러시아군에 잡히거나 투항한 체코 출신 병사들을 독일과 싸울 군대로 재편성한 외인부대. 독일과 휴전협정을 맺고 연합국 대열에서 이탈한 레닌에게 체코군단은 뜨거운 감자였다. 독일과 계속 싸우겠다며 항전의지를 불태웠기 때문이다. 체코군단을 러시아에서 빼내 프랑스 전선에 투입하자는 연합국의 종용에 대한 레닌의 선택은 우회귀국. 국경을 바로 넘기가 여의치 않다는 명분으로 시베리아를 돌아 선박으로 유럽전선에 보내는 길을 택했다. 문제는 시베리아 열차편에 독일군 포로도 같이 있었다는 점. 독일ㆍ오스트리아군 포로들과 체코군단의 우발적 충돌을 정리한다며 붉은 군대가 체코 병사들을 구금하자 군단 전체가 들고 일어났다. 결과는 붉은 군대의 완패. 체코군단 4만7,000여명은 교통의 요지인 첼랴빈스크시를 완전히 점령했다. 군자금도 없었던 체코군단은 갈수록 강해졌다. 수천량의 열차와 러시아 황제가 감춰뒀던 금괴며 무기를 탈취한 덕분이다. 시베리아 철도노선에서 은행과 우체국ㆍ신문사까지 운영하며 동진을 계속하던 체코군단의 소식은 전세계에 체코 독립의 당위성을 알려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또 다른 체코군단이 만들어졌다. 무기는 물론 병력까지 보낸 열강의 지원에 힘입어 체코군단은 첼랴빈스크 사건 발생 2년 후 전원 블라디보스토크에 안착, 고국행 배를 올랐다. 귀국 직전 체코군단은 자신들처럼 조국의 독립을 갈망하던 조선 청년들과 만나 패물을 받고 무기를 넘겼다. 체코군단의 무기로 무장한 독립군은 청산리에서 청사에 길이 빛날 대승을 거뒀다. 요즘도 체코에서는 조선의 금가락지와 금비녀ㆍ옥구슬을 간직한 체코군단의 후손들이 심심치 않게 나타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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