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막걸리 엑스포를 계기로 본 막걸리 열풍<br>쌀소비·한식 세계화 등 시기 적절<br>재료 국산화 등 고급화로 승부수<br>양조장도 문화상품으로 키워야
| 지난 8월 열린 2009 공학 교육 연구 국제학술회에서 공식건배주로 선정된 막걸리를 마시고 있는 외국인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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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30년째 막걸리 연구에 매달려온 정헌배 중앙대 교수는 요즘 마치 꿈을 꾸는 것만 같다고 말한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싸구려 술’로 홀대받던 막걸리가 최근 우리 사회의 새로운 소비 키워드로 떠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막걸리가 콧대높은 특급호텔과 백화점은 물론 국제선 항공기 기내식에 당당히 입성한 데 이어 각종 국제행사의 공식 건배주로도 러브콜이 쇄도하고 있다. 정 교수가 처음 막걸리 연구를 시작했을 당시 꿈꾸던 일들이 하나 둘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그는 “막걸리야말로 프랑스 와인과 견주어도 맛이나 효능 면에서 결코 뒤지지 않는 명품 술”이라며 “이제 우리도 헤네시, 까뮤, 발렌타인 가문처럼 한국을 대표하는 명품 막걸리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서민의 술’ 막걸리가 한국을 넘어 세계인의 술로 도약하기 위한 힘찬 날갯짓을 하고 있다. 최근 일본을 시작으로 미국, 중국으로까지 수출국을 확대하고 있으며 좋은 원료로 만든 고급 막걸리도 계속 개발되고 있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막걸리 열풍이 자칫 ‘일장춘몽’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꾸준한 품질개발 노력과 체계적인 관리가 뒷받침돼야 한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일본발 인기 업고 금의환향하다= 최근의 막걸리 열풍은 사실 국내가 아닌 바다 건너 일본에서 상륙했다. 한류 열풍에 힘입어 한국 문화에 대한 일본인들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자연스레 한국 음식과 함께 한국 술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 특히 물가가 비싼 일본에서는 좀처럼 만나보기 힘든 저렴한 가격의 막걸리는 일본인들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풍부한 영양소와 낮은 알코올도수, 특유의 톡 쏘는 청량감 등은 맑고 깨끗한 술만 마시던 일본 소비자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한류 열풍을 이용해 싼 값에 막걸리를 들여와 높은 마진을 남길 수 있다는 일본 유통업자들의 상술도 한 몫했다. 이들은 막걸리를 처음 접하는 일본인들이 보다 쉽게 막걸리와 친해질 수 있도록 막걸리 칵테일을 개발하는 등 변신을 시도했다.
막걸리 특유의 맛과 향에 매료된 일본인들은 ‘막걸리의 본고장’ 한국을 방문해 막걸리를 찾기 시작하면서 국내에서도 새삼 막걸리의 가치를 다시 보게 된 것이다. 한국에서는 소주와 맥주에 밀려 ‘싸구려 술’로 천대받던 막걸리가 일본인들의 폭발적인 애정을 등에 업고 ‘금의환향’한 셈이다. 더욱이 최근 늘어나는 쌀 재고량 문제로 국산 쌀의 새로운 소비처 확보가 절실한 상황에서 정부의 한식 세계화 움직임까지 맞물리면서 막걸리 열풍의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막걸리를 찾는 내ㆍ외국인들이 크게 늘면서 특급호텔과 백화점들도 앞다퉈 막걸리 판매에 합류, ‘서민의 술’에서 ‘귀하신 몸’으로 거듭나고 있다. 정헌배 교수는 “지금의 막걸리 열풍은 일본에서 불기 시작한 작은 바람이 바다를 건너오면서 태풍으로 확산돼 국내로 상륙한 격”이라며 “늦게나마 그동안 막걸리의 진정한 가치를 몰랐던 한국인들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젠 고급화로 승부한다= 높아진 위상에 걸맞게 한층 고급화된 막걸리를 만들기 위한 양조업체들의 노력도 계속되고 있다. 전통주업체 국순당은 지난해 7월 고려시대 귀족들이 즐겨마신 것으로 알려진 고급 막걸리 ‘이화주’를 복원, 제품화하며 프리미엄 막걸리 시대를 열었다. 이화주는 옛 문헌 그대로 누룩과 떡(백설기)를 이용해 빚은 고급 탁주로 숟가락으로 떠먹을 수 있을 정도로 걸쭉한 주질이 특징이다. 알코올도수가 14도로 일반 막걸리보다 2배 이상 높은데다 가격도 300ml 한 병에 2만4,000원으로 국내에 판매중인 막걸리 중 최고가다. 그런데도 국순당 백세주마을에서는 사전주문을 하지 않으면 마시기 힘들 정도로 소비자 반응이 뜨겁다. 김계원 국순당 연구소장은 “막걸리를 세계화하기 위해선 좋은 원료를 만든 고급 막걸리를 개발할 필요가 있다”며 “이화주는 원료부터 처리과정, 포장용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분에서 고급화를 추구했다”고 설명했다.
국순당은 이화주 외에도 100% 국내산 쌀과 인삼으로 빚은 막걸리인 ‘미몽(米夢)’을 내놓은 데 이어 최근에는 농촌진흥청과 공동 개발한 양조 전용쌀 설갱미를 주원료로 산사자, 산수유 등 한약재를 넣은 ‘맑은 백세 막걸리’를 출시했다.
정헌배인삼주가의 ‘진이(眞伊)’도 고급 막걸리 계보를 새로 쓰고 있다. ‘진이’의 가격은 한 병(500ml)에 2만5,000원으로 같은 용량의 일반 막걸리에 비해 무려 35배나 비싸다. ‘진이’는 철저한 수작업을 통해 하루 100병만 생산할 정도로 희소성이 높은데다 판매처도 신세계백화점과 인천공항 롯데면세점으로 한정해 고급화에 초점을 맞췄다. 정 교수는 “경기도 안성산 햅쌀과 6년근 인삼 등을 사용해 원료 비만 일반 막걸리 대비 10배 이상 비싸며 알코올도수가 2배 가량 높고 식품첨가물을 전혀 넣지 않았다”며 “원료 생산자와 생산지역, 추수시기 등을 제품에 표기해 소비자 신뢰도를 높였다”고 말했다.
배상면주가도 다음달 초 포천의 국산 햅쌀로 빚은 누보 막걸리를 대형마트와 고급 프랜차이즈 음식점 등에서 선보일 예정이다.
◇세계화 아직 갈 길 멀다= 전문가들은 막걸리가 진정한 한국 대표 술로 거듭나기 위해 아직 풀어야 할 숙제가 많다고 지적한다. 주원료인 쌀의 국산화가 가장 시급한 과제로 꼽힌다. 농림수산식품부에 따르면 지난해 술을 만드는 데 사용된 3만6,000톤의 쌀 가운데 국산은 20%(7,000톤)도 채 되지 않는다. 한나라당 한홍준 의원이 최근 국세청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서도 국내 막걸리 출고량 상위 20개 업체 중 국산 쌀을 사용하고 있는 곳은 단 한 곳에 불과했다. 우리가 마시고 있는 대다수 막걸리가 사실은 국산 쌀이 아닌 수입산 쌀로 빚어지고 있는 셈이다. 박록담 한국전통주연구소장은 “진정한 전통주는 우리 고유의 누룩과 쌀로 빚은 술이어야 한다”며 세계 어느 나라의 명주도 자국 농산물이 아닌 수입 원료로 만들어 성공한 사례가 없다고 주장한다.
국내산 쌀값이 수입산보다 3배 가량 비싼데다 그동안 수입산 쌀의 의무수입량 소비 차원에서 국내 양조업체들에게 수입산 쌀 사용을 권장해온 배경이 있지만 프랑스 와인, 독일 맥주, 일본 사케 모두 자국산 농산물을 주 원료로 한다는 점을 감안할때 수입산 쌀로 만든 막걸리가 세계인들에게 어떻게 다가설지 의문이다. 장기적으로 원산지 표시제, 품질 인증제 등을 통해 국산 원료의 사용을 유도해나갈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높다. 최근 국내산 햅쌀로 만든 일명 ‘막걸리 누보’가 소비자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은 시사점이 있다.
막걸리의 원료 및 제조공정 등도 표준화해야 한다. 한국양조과학회 총무이사를 맡고 있는 정철 서울벤처정보대학원대학교 교수는 “세계적으로 맛이 표준화된 맥주나 와인처럼 막걸리도 맛과 향은 물론 제조공정까지 항상 일정해야 진정한 세계화가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배송자 신라대 막걸리 세계화연구소장 역시 “막걸리 세계화의 전제조건은 과학화”라며 “지금이야말로 생산공정과 발효공법, 위생안전관리 등 관련 연구 개발에 집중적으로 투자해야 할 시기”라고 말한다.
막걸리를 단순히 먹고 마시는 술을 뛰어넘어 하나의 문화상품으로 키워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허시명 막걸리학교 교장은 “막걸리 열풍을 계속 이어나가려면 일본과 프랑스처럼 우리도 양조장을 개방해 언제나 누구든지 찾아올 수 있는 관광상품으로 개발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박록담 소장도 “생산자가 자신의 양조장을 소비자와 함께 즐길 수 있는 축제의 장으로 만들려는 노력이 뒤따라야 막걸리 대중화가 가능할 것”이라고 조언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품질 개발 노력이다. 정헌배 교수는 “지금처럼 국내 양조업체들이 품질보다는 가격경쟁에만 치우쳐 각종 첨가물이 든 막걸리를 만들다가는 결국 다같이 망하게 될 것”이라며 “어렵게 찾아온 막걸리 부흥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면 까다로운 소비자 입맛을 사로잡을 수 있는 고품질 막걸리 개발에 몰두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허시명 교장도 막걸리가 자칫 지금의 인기에 취해 소비자 취향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못한다면 제 살 깎아먹기식 가격경쟁으로 몰락을 자초했던 복분자주나 가시오가피주의 전철을 되풀이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한다. /김현상기자 kim0123@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