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8년 12월17일은 한국의 60년 증권 역사에 큰 분기점이 된 날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테이프커팅과 함께 '한국투자개발공사'가 설립된 날이기 때문이다. 투공은 '자본시장육성법' 제정의 결과다.
1962년 이후 증시는 6년간 암흑의 터널을 지나고 있었다. '5월 증권파동'의 상처가 너무 깊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1968년 하반기부터 증시에 훈풍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정부가 증권시장에 다시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본시장육성법은 여섯 가지의 주요한 내용으로 구성돼 있었다. ▦투공을 발족시켜 시장에 개입하겠다는 것 ▦생명보험회사에 '증권부'를 설치해 보험자금의 증시 유입을 유도하는 것 ▦'신탁은행'을 신설해 증권금융의 폭을 대폭 늘려가는 것 ▦법인세법을 개정해 상장법인에 대한 세율을 대폭 내리는 것 ▦증권거래법을 개정해 증권회사의 자본금하한을 대폭 인상하는 것 ▦'증권거래위'를 설치한다는 것 등이다.
이 중 투자공사 설립은 교착 상태에 빠진 전장에 소총과 박격포가 아닌 전세를 뒤집을 주포를 동원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정부는 투공을 설립해 전권을 줘 유가증권시장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전담하게 하는 한편 신탁은행을 발족시켜 경제성장에 따른 증가자산 관리운용을 전담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경제 여건도 호전됐다.
증시는 오랜 동면에서 깨어났다. 투공은 과감한 투자로 증시를 주도했고 시장 영향력은 막강했다. 거래소에서 발표하는 종합주가지수와 별도로 자체적으로 '투공지수'를 산출해 발표할 정도였다. 1977년 2월 개정된 증권거래법에 따라 증권감독원과 대한투자신탁으로 분할되기 전까지 투공이 주포 역할을 하던 8년여간 증시는 무려 1,600% 상승했다. 매년 연평균 200%의 폭발적인 상승세를 보인 것이다.
최근 투자자들은 저금리와 부동산 침체, 주식시장의 불확실성에 마땅한 투자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투공의 후신인 하나대투증권은 지난달 자산관리업무 강화를 위해 과감한 조직개편을 단행했다. 정윤식 전무는 하나은행과 외환은행 등 하나금융그룹의 거대하고 다양한 고객기반에 하나대투증권의 상품개발 솔루션을 매치해 특화되고 차별화된 솔루션을 제공하겠다며 과거 대한투자신탁이 얻었던 '자산관리의 명가'라는 명성을 되찾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시장의 기대도 크다. 증권사 등 기관의 이러한 노력이 확산돼 장기적인 수요 기반이 확충되기를 바라고 있다. 2년이 넘는 교착 상태에 지친 투자가들은 70년대 대세 상승의 주포였던 투공처럼 지금의 증시를 주도해줄 또 다른 주포에 대한 갈증에 목말라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