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이 1만달러 고지에 올라선 지난 96년 최대 이슈 가운데 하나는 과소비였다. 소득은 개도국 수준인데 소비수준은 선진국 뺨친다는 비아냥이 나올 정도로 소비가 과열이었다. 특히 의식주와 같은 기본적 소비보다 사치ㆍ여행ㆍ취미생활 등과 관련된 이른바 선택적 소비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이 문제였다.
따지고 보면 국민소득 1만달러대에 들어서면서 소비패턴이 달라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여전히 저축을 미덕으로 여기는 개발연대의 잣대로 보면 경제를 망칠 수 있는 위험스러운 풍조로 비쳐졌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듬해 우리 경제가 혹독한 환란의 수렁에 빠진 것을 생각하면 과소비를 둘러싼 걱정이 공연한 기우는 아니었던 것 같다.
소득 2만달러의 복병 해외소비
그로부터 10년여 만인 지난해 1인당 국민소득은 2만달러를 넘어섰다. 상당 부분 환율덕분이기는 하지만 환율 자체가 경제력을 반영하는 것이므로 2만달러 진입을 과소평가할 이유는 없다. 흥미로운 것은 소득이 배나 늘어났으면 과소비로 떠들썩할 만도 한데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점이다, 역설적으로 저소비가 문제다. 우리 경제의 잠재력에 걸맞은 적정성장을 유지하려면 적어도 소비가 7~8% 정도는 늘어나야 하지만 절반 수준도 안 될 정도로 극심한 소비부진을 겪고 있다. 소비가 이처럼 부진한 원인은 여러 가지로 분석된다.
우선 경제성장률이 낮고 일자리 창출이 안 되다 보니 소득이 늘지 않고 결과적으로 소비여력이 적을 수밖에 없다는 순환론이다. 실제 경제는 5% 가까이 성장하고 있지만 교역조건이 나빠진 탓에 국민소득은 거의 제자리걸음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높은 청년실업률과 낙타가 바늘구멍을 지나가는 것으로 비유되는 취업난이 말해주듯 양질의 일자리 창출도 안 되고 있다.
지난 몇 년간 투기광풍으로 집값ㆍ땅값이 치솟자 너도나도 은행돈을 빌려 부동산에 묻어둔 것이 더 큰 화근이 됐다. 뒤늦게 주택담보대출을 조이고 금리가 올라가면서 가계의 이자부담이 크게 늘고 있기 때문이다. 늘어나는 이자부담 때문에 빠듯한 소비여력이 더 위축되고 있는 것이다. 부동산본위경제의 덫에 걸린 형국이다.
그러나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해외소비를 보면 소비가 꼭 소득이나 일자리, 또는 부동산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주로 고소득층이기는 하겠지만 개방바람을 타고 국내소비보다 해외소비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는 해외관광과 유학비용이 단적인 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관광지 제주도가 파리 날린다는 얘기가 나온 지 오래지만 해외소비는 과열이다. 이런 해외소비의 일부라도 국내로 돌리면 경제사정이 휠씬 좋아질 것이라 여겨진다.
한국적 정서로 본다면 어려운 경제를 외면하고 해외에서 펑펑 쓰는 것이 야속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소비는 전적으로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만족을 얻으려는 합리적인 선택의 결과이다. 바꿔 말하면 같은 비용으로 해외에서의 소비에 따른 만족도가 국내보다 휠씬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해외소비를 탓할 것이 아니라 국내의 무엇이 잘못됐는가를 따져보고 개선책을 강구하는 것이 올바른 대응책이다. 국내에서의 소비를 꺼리고 해외소비
가격파괴로 경쟁력 높혀야
를 부추기는 결정적인 원인은 국내 물가가 터무니없이 비싸다는 데 의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국인들이 즐기는 골프만 해도 그렇다. 우리보다 소득이 두 배나 높은 일본이 ‘싸다’며 줄지어 골프여행을 떠나는 현실은 터무니없이 비싼 국내 물가의 현주소를 그대로 말해준다.
우리보다 소득이 낮은 중국이나 동남아에서는 그저라는 느낌이 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국내 물가는 높다. 그 이유는 생산성이 뒷받침 안 되는 높은 인건비일수도 있고 과도한 세금일수도 있다. 인건비ㆍ세금뿐 아니라 땅값ㆍ집값을 비롯한 모든 것이 비싼 나라에서 소비뿐 아니라 투자가 안 된다고 해서 조금도 이상할 게 없다.
지구촌이 하나의 경제권으로 통합되는 글로벌경제에서는 가격만큼 정확한 경쟁력 잣대도 없다. 해외로 나가는 소비를 국내로 돌리고 경제를 살리려면 가격파괴 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