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각판사’를 아시나요?” ‘코리안 타임’이 유행했던 적이 있다. 공식적인 약속시간에도 때 맞춰 나타나지 않는 한국인들을 외국인들이 지적한 말이다. 코리안타임은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애교’로 봐 넘길 정도였다. 대학에서도 10여분의 지각은 양해될 정도로 ‘코리안타임’이 광범위하게 인정돼 왔다. 하지만 글로벌 의식이 높아진 지금에는 ‘코리안타임’은 이미 추억이 된 지 오래다. 그러나 지난 국정감사 때 법정내에서는 ‘코리안타임’이 여전하다는 지적이 제기돼 눈길을 끌었다. 27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속 우윤근 민주당 의원이 최근 법원 국감에서 공개한 법률소비자연맹의 2008 법정 모니터 현황 자료에 따르면 올해 3월부터 6월까지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재판에서 '지각 판사'를 봤다는 응답은 전체 모니터 요원 1,522명 가운데 179명(11.8%)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부분은 재판 개정 시간보다 5분 이내로 늦는 경우였지만, 10분 이상 지나서야 법정에 들어섰다는 경우(1.9%)도 있었다. 특히 이들 가운데 84.6%(159명)는 "지각에 대한 사과 없이 재판을 그냥 진행했다"고 지적했다. 모티터링 기간이 3개월로 짧고 장소도 서울중앙지법에 한정돼 진행됐지만, 기간을 늘리고 전국 법원으로 확대할 경우 ‘지각판사’ 비율은 확대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실제 본지 기자가 지난 10월24일 서울지법의 한 법정을 취재한 결과, 오전 10시 재판이 25분이 지난 뒤에야 겨우 열렸다. 전국민적 관심을 불러모은 ‘병풍사건’의 주역인 김모씨의 사기혐의에 대한 항소심 선고가 예정돼 있어, 일부 방청객은 재판 10여분전부터 자리에 앉아 결과를 기다렸다. 재판이 지연되자 구속된 피의자들과 함께 대기하고 있던 경찰은 6번이나 대기실 문을 열고 재판부 도착을 확인하는 진풍경도 벌어졌다. 사건자료를 검토하던 검사와 변호사는 물론, 재판을 초조하게 기다리던 방청객 역시 당황해 하는 기색이었다. 10시25분에서야 재판부가 법정에 나와 “서면 검토 때문에 늦었다. 미안하다.”고 말한 뒤 재판을 시작했다. 10시 재판이 지연됨에 따라 10시30분, 11시에 예정됐던 이날 재판들도 줄줄이 늦어졌다. 이에 법원은 준비서면 도착 지연으로 이에 대한 검토 시간이 필요하고, 판사부족에 따른 불가피함을 호소하고 있다. 서울지법의 홍준호 공보판사는 “현행법상 변호인들은 준비서면을 재판 7일 전에 제출해야 하는데, 이를 지키는 경우는 거의 없다”며 “대개 재판 전날 접수된 자료들은 재판 당일 오전에 재판부에 오기 때문에 자료를 다 검토하고 재판에 들어오다 보니 ‘지각’사태가 빚어지는 것 같다”고 해명했다. 홍 판사는 “지각판사에 대한 국민적 여론을 감안해 개선노력을 꾸준히 펴고 있다”고 덧붙였다. 또한 만성적인 판사 부족난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적게는 10건에서 많게는 20여건의 재판을 끝내야 하는 ‘무리한 일정’이 ‘지각판사’를 양산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일각에서는 재판연구관이나 사법연수원 교수, 법원행정처 직원 등으로 활동하거나 파견 근무ㆍ해외연수 로 ‘재판을 담당하지 않는 비가동 법관’의 수를 줄이는 방법도 거론되고 있다. 비가동 법관은 전체법관의 10%인 242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