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우왕좌왕 한국 vs 일사불란 미국

▨ 한미 11·23 연평도 포격, 9·11 테러 위기대응 이렇게 달랐다


SetSectionName(); 우왕좌왕 한국 vs 일사불란 미국 ▨ 한미 11·23 연평도 포격, 9·11 테러 위기대응 이렇게 달랐다 뉴욕=이학인특파원 leejk@sed.co.kr 이철균기자 fusioncj@sed.co.kr 임세원기자 why@sed.co.kr [ 北 11·23 연평도 도발 관련 화보보기 ] ImageView('','GisaImgNum_1','default','260');

미국의 상징이었던 110층짜리 세계무역센터(WTC)가 테러를 당했던 지난 2001년 9월11일. 미국은 안보위협 앞에 너나 할 것 없이 똘똘 뭉쳐 현실이 된 위협을 물리쳤다. 정부나 정치권ㆍ국민은 마치 진흙처럼 안보 위협 앞에서는 틈이 없었다. 북한의 무차별적인 포격으로 민간인 2명이 희생을 당했던 2010년 11월23일 연평도 포격. 안보위기 앞에서조차 정치적 색채에 따라 서로를 삿대질했다. 안보 불감증을 여실히 보여주면서 안이한 한반도의 현실 인식이 그대로 나타났다. 모래알 그 자체였다. 2010년 대한민국은 위기다. 3월 천안함 폭침 사건에도 위기의식은 여전히 낮다. 그리고 다시 터진 게 연평도 포격. 60년 동안 전쟁을 끝내지 못한 휴전 상태에 놓였다는 현실을 방관한 채 '북한이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며 우왕좌왕만 하고 있다. 한반도는 9년 전의 미국과는 너무도 달랐다. 안보위기 앞에서는 정치색채가 달라도 똘똘 뭉쳐 먼저 극복부터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비등하는 이유다. 한국, 대통령 지시 내용 싸고 혼선 정치권선 책임공방 설전… 규탄결의문도 뒤늦게 채택 군은 정확한 상황 인식 못하고 대응 미숙 곳곳 드러나 6ㆍ25전쟁 후 60년 만에 대한민국 영토가 북한의 무차별적인 포격으로 유린당할 때 정부와 정치권ㆍ군(軍)은 우왕좌왕 그 자체였다. 단합된 모습도 없었다. 모래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북한이 연평도를 포격한 시간은 11월23일 오후2시40분. 이명박 대통령은 10여 분 뒤에야 천영우 외교안보수석으로부터 연평도 사태를 보고 받았다. 대통령이 즉각 청와대 별관의 지하벙커로 자리를 옮겨 수석비서관 회의를 단행했지만 지시 내용을 놓고 혼선은 시작됐다. "확전되지 않도록 만전을 기하라"로 알려진 대통령의 첫 지시는 몇 시간 만에 "단호하게 응징해야 한다"로 바뀌었다. 이 소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대통령 지시 내용을 놓고 여야 간 논란이 커졌고 결국 작전을 지휘하던 국방부 장관과 청와대 국방비서관의 경질로 이어졌다. 만약 혼선이 여기에서 그쳤다면 작은 에피소드 정도로 끝날 수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질 못했다. 영토가 유린당하고 있음에도 '확전'을 놓고 설전이 이어졌다. 확전은 곧 전면전을 뜻하므로 이를 경계하는 지시가 옳았다는 주장과 우리군이 적군과 포탄을 주고 받는 상황에서 적절하지 않았다는 반박이 맞섰다. 더 나아가 청와대가 정치적 계산에 따라 안보문제에 무원칙을 보여준다는 지적까지 제기되면서 혼란 그 자체였다. 정치권의 모습도 안보위기 관리보다는 인기 관리에 더 신경을 쓰는 모습을 보였다. 대북정책을 놓고 전ㆍ현 정권을 탓하는 책임공방에 수많은 정치적 수사만을 쏟아냈다. 정치권은 사태 당일 현장 보고를 들어야 하는 국방장관 등을 국회에 한 시간 이상 붙잡아놓아 국민들의 질타를 받았다. 한나라당 의원은 엉뚱하게 현장에서 포탄을 가져와 공개하며 '안보 위기를 틈타 자기 정치를 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민주당 출신인 인천시장은 현장에서 포탄에 맞은 소주병을 보고 "진짜 폭탄주네"라는 실언도 나왔다. 이와 함께 부상장병은 헬기에 타지 못했는데 정치인들은 의전용 헬기를 타고 연평도를 왔다간 사실이 밝혀져 여러 뒷말이 나왔다. 국회에서 대북규탄결의안을 채택하는 데도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연평도 포격 뒤 이틀이 지난 25일에야 채택했다. 당사자 국가이면서 미국이나 유럽연합(EU)보다 늦게 대북규탄결의안을 채택했다. 여당은 퍼주기식 대북정책이 포탄으로 돌아왔다고 공격했고, 야당은 이명박 대북정책은 실패했다고 단언했다. 한편 여ㆍ야 할 것 없이 사태가 마무리되기도 전에 관련자 문책을 들먹인 일은 대책 없이 비난만 하는 정치권의 한계를 보여줬다는 혹평을 받았다. 이에 정치권도 "북한이 원하는 것은 남남갈등이므로 정치권이 단합된 모습을 보여야 한다(김영우 한나라당 의원)" "과거정부와의 대응 차이점 등을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정태근 한나라당 의원)"는 등 분열을 경계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K-9자주로 80발로 대응사격을 했던 군의 대응은 또 어땠을까. 북한과 맞닿아 있는 최전방임에도 불구, 군의 대응과 장비 관리는 낙제였다. 1차 피격 후 13분, 2차 피격 후 14분이 걸린 맞대응 시간은 민간인 사망을 막는 데 역부족이었다. 1차는 그렇다 쳐도 2차 포격에도 북한의 사격이 끝나고 반격을 한 일은 늑장 대응이라는 비판이 속출했다. 이에 대해 김태영 국방부 장관은 "스타크래프트를 생각한다면 바로 쏘면 된다. 그러나 실제 상황에서 포탄이 여기저기 낙하하는 데 곧바로 쏜다는 것은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니다"라고 응수했다. 더구나 시간이 지날수록 군의 생명인 무기관리가 소홀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북한이 1,000문의 해안포로 포격을 해올 때, 우리 군은 사실상 유일한 대응 무기인 6문의 K-9 자주포 중 2문은 공격 받기도 전에 고장이 나 있었다. 또 1문은 곧바로 응사를 할 수 없었다. 결국 6문 중 전력의 절반인 3문으로 초동 반격을 가했다. 이뿐 아니다. 북한이 연평도 포격 6시간 전에 보낸 경고성 전언통신문을 국방부가 묵살했다. 또한 8월 군의 감청부대가 북한군이 서해 5도 지역에 대해 대규모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를 감청해놓고도 이번 사태를 대비하지 못한 점은 군 수뇌부의 '북한이 이렇게 세게 쏠 줄 몰랐다'는 군의 대답을 믿지 못하게 만들었다. 부시 30분만에 성명 발표 즉각적 재건·테러응징 다짐 성조기 게양·추모식 통해 애국심고취·단합된 힘 과시 지난 2001년 9월11일 오전 출근길 미국 뉴욕 맨해튼. 피랍된 항공기 2대가 시차를 두고 세계무역센터(WTC)를 들이받아 미국의 상징적 건물이 차례로 무너지는 광경을 목격한 미국은 한데 뭉쳤다. 미국 본토가 공격받은 초유의 사태에 미국인은 즉각 '재건'과 '단합'을 외쳤다. 미국인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각 가정에 성조기를 게양하는 등 테러는 애국심에 불을 댕겼다. 2001년 9월11일 오전8시45분 피랍된 AA11여객기가 세계무역센터 북쪽 빌딩과 충돌했고 9시3분에는 UA-175기가 남쪽 빌딩에 충돌했다. 당시 플로리다의 초등학교를 방문하고 있던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이를 보고 받은 뒤 9시30분 "미국이 테러공격을 받았다"고 짤막하게 밝혔다. 부시 대통령은 안전상의 문제를 제기하는 참모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F-16의 호위도 받지 않은 채 에어포스원을 이용, 워싱턴으로 복귀했다. 그는 이날 밤 생중계를 통해 성명을 발표하고 이어 이튿날 기자회견에서 재건과 함께 테러세력에 대한 응징을 다짐했다. 국가위기를 맞아 당당한 국가리더의 모습은 국민들을 안심시키기에 충분했다. 부시 대통령은 이어 20일에는 상하 양원 의원들이 모인 가운데 대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자 미 의원들은 여야를 불문하고 30여 차례나 기립박수를 치며 열렬한 지지를 나타냈다. 2001년에도 부시 대통령의 지지율은 50%대를 맴돌고 있었다. 하지만 9ㆍ11테러가 발생한 후 지지율은 88%로 치솟았다. 사상 유례없는 테러로 엄청난 피해가 초래됐지만 사전에 테러를 예상하지 못한 정부에 대한 책임 추궁이나 테러의 빌미가 된 부시 대통령의 강경외교 노선 등에 대한 비판은 전혀 제기되지 않았다. 진보나 보수에 따라 사건을 제멋대로 해석하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미국 국민들은 이보다는 테러범들에 대한 응징과 재건에 힘을 실어줬다. 미국인들은 집집마다 성조기를 내걸고 달리는 차에도 성조기를 나부끼며 차분하면서도 결연하게 애국심과 단합된 힘을 과시했다. 미국 정부는 테러범들을 색출하고 그들의 사진을 공개했다. 그리고 다음달인 10월에는 테러의 주범으로 파악한 사우디 오사마 빈라덴에 대한 테러와의 전쟁을 개시한다. 이 과정에서 정치권이나 국민들은 정부에 대한 신뢰를 보냈으며 정부 또한 연방수사국(FBI) 등의 정확하면서도 신속한 조사를 통해 확보한 정보를 공개함으로써 억측이나 루머의 여지를 차단했다. 테러 참사현장에서의 수습과정에서도 소방대원 등의 헌신적인 자세와 희생자들을 영웅시하는 미국인들의 태도는 전세계인들에 큰 감동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먼지를 뒤집어쓴 채 현장을 누비며 구호작업을 진두지휘했던 루돌프 줄리아니 전 뉴욕시장의 모습은 세계에 선명히 각인됐다. 그는 후일 재직시 참석했던 숨진 소방관들의 장례식을 회고하면서 "그들을 빗속에서, 또는 눈 속에서, 어떤 날은 하루 12번씩 장례를 치르며 떠나보냈다"며 "하나도 너무 많은데 343이라는 숫자는 견디기에는 너무 벅차다"고 말했다. 미국 정부는 테러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 3개월ㆍ6개월 단위로 대규모의 추모식을 거행하며 상처 받은 국민들을 위로했다. 그리고 매년 9월 열리는 추모식에서는 희생자 전원의 이름을 호명하는 순서를 갖는다. 유족들을 위로하는 한편 이는 국가를 위한 희생자는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정치권의 움직임도 큰 시사점을 보여준다. 미국 의회는 2001년 10월에는 테러용의자 등에 대한 구금 등을 허용하는 애국법(Patriot ACT)을 제정해 정부를 전적으로 지원했다. 이듬해인 2002년 2월에는 여야 합동으로 의회의 9ㆍ11테러 조사위원회를 설치해 근본적인 문제점을 파악하는 데 주력했다. 이 위원회는 20개월의 활동을 거쳐 보고서를 발간했으며 의회는 이를 토대로 정보개혁 및 테러방지법 등을 제정했다. 미국 정부와 정치권, 그리고 국민들은 9ㆍ11 테러 이후 대응 과정에서 그들이 수십년간 세계 초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이유를 보여줬다. 그것은 상호 간의 신뢰와 단합,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정부의 일처리 능력이었다. 혼자 웃는 김대리~알고보니[2585+무선인터넷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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