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나의 일 나의 인생] (4) 나준호 예림당 회장

일자 여인숙은 그야말로 인간 잡화점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난 외에는 닮은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출퇴근 시간도 구구각색이어서 낮을 밤같이 밤을 낮같이 사는 사람도 있었다. 하루 이틀 묵는 사람들보다 장기 투숙자들이 많았고, 밤이면 술판이 벌어지는 일도 잦았다. 모두가 비슷비슷한 처지다 보니 한두 번 술잔을 기울이고 난 후에는 친구가 되거나 나이를 따져 호형호제로 통했다. 함께 어울려 술을 마실 때면 저마다 과거지사가 비어져 나왔다.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긴 이도 있고 빚 독촉에 시달려 야반도주로 고향을 떠나온 사람, 고무신 한 켤레 때문에 전과자가 됐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얘기를 듣다 보면 나는 그야말로 백면서생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청량리 시장을 무대로 하는 깡패들도 있었다. 어쩌다 그들 중 한 명과 말을 텄는데 처음에는 인간성 좋은 기분파로만 알았다. 서너 번 따라 나가 밥을 얻어먹고 맥주도 얻어 마셨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밥이며 술은 모두 공짜였다. 시장 상인한테 `안녕하슈` 하고 손을 내밀면 약간의 돈을 쥐어주기도 했다. 일종의 상납이었다. 나는 아차 싶었다. 그는 나를 자기네 패거리에 끌어들일 심산이었던 것이다. `이건 아니다. 내가 깡패가 되다니!`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뒤로는 가급적 그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다. 같이 나가자고 하면 이리저리 핑계를 대고 피했다. 그러자 그는 밤중에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하룻밤 신세 좀 집시다` 하고 드러누워 자기도 했다. 몇 번 그런 일이 있었지만 거절할 수도, 파출소에 신고할 수도 없었다. 내 방에 함부로 들어와 잠잔 일 외에 해코지한 일이 없는데다가 보복도 두려웠기 때문이다. 한밤중에 느닷없이 임검이 닥치기도 했다. 어느 날 누가 방문을 두드려 열어줬더니 경찰관과 방범대원이 신발 신은 채 방으로 들어와 이불과 옷 등을 닥치는 대로 뒤져 난장판을 만들어 놓고 그냥 나가는 것이었다. 엉겁결에 당한 일이었지만 참고 있을 수가 없었다. “보소, 경찰관이면 다요? 이래도 되는 거요?” 내가 큰 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뭐가 잘못됐나?” 방범대원이 내 말을 받았다. “그럼 잘했다는 거요? 남의 방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고 이게 뭐요.” 나 역시 화가 나서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당신 뭐 하는 사람이야. 직업이 뭐야. 공무집행 방해죄로 콩밥 먹고 싶어?” “공무집행 방해? 남의 방에 신발 신고 들어와 다 뒤집어 놓고, 뭐? 콩밥?” 내 목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숙박하던 사람들이 모두 나와서 지켜보았다. 그 때 여인숙 여주인이 경찰관 앞을 막아 서면서 말렸다. “아유~, 밤마다 순찰에, 임검하시느라 얼마나 힘드세요? 나 선생님은 경상도 분이라 말씨가 투박해서 그러니까 이해하세요.” 그러면서 경찰관을 밖으로 끌었다. “거 참 시원하게 말 한번 잘했소. 제 놈들 안방에 누가 신발 신고 들어가서 살림살이 엎어 봐. 기분이 어떤지.” “그러게 말야. 나 선생 덕분에 속이 다 후련해졌네.” 지켜보던 사람들이 그제서야 한 마디씩 거들었다. 애인과 함께 있던 친구가 숙박비가 떨어졌다며 며칠만 내 방에서 신세를 지자고 했다. 여인숙에서 제일 큰 방을 차지하고 있던 나는 `하루 이틀쯤이야` 하고 허락을 했다. 그러나 한 달이 넘도록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냥 잠만 자는 것이라면 곤란할 일도 없겠지만 한창때다 보니 밤마다 이불 속에서 그 일(?)을 치르는데 옆에 누운 나에게는 보통 고문이 아니었다. 깊이 잠든 척 시치미 떼고 숨소리조차 죽이며 꼼짝할 수 없는 괴로운 밤을 보냈다. /아시아태평양출판협회장ㆍ예림 경기식물원이사장ㆍ전(前)대한출판문화협회장 <김상용기자 kimi@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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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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