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기고] 컨버전스는 융합 아닌 '결합'

2008년 베이징올림픽 개막을 앞두고 베이징시가 엉터리 중국식 영어 표현인 ‘칭글리시(Chinglish)’ 추방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 소식이다. 한 예로 중국의 식당 중에는 영계를 뜻하는 ‘둥즈지(童子鷄)’를 ‘성생활을 하지 않은 닭(a chicken without sexual life)’으로 엉뚱하게 번역해놓은 곳이 적지 않다고 한다. 한편 우리 주변에도 고전의 번역이나 외국의 문학작품을 들여오면서 종종 발생하는 오역 때문에 원전의 의미가 왜곡되는 사례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다. 최근 몇 년 사이 우리나라에는 ‘방송ㆍ통신 융합’이라는 말이 널리 사용돼왔다. 그런데 이 융합이라는 단어는 영어의 컨버전스(convergence)를 번역한 것이다. 그러나 컨버전스는 두개의 서로 다른 물질이나 서비스가 한 지점에서 만남, 수렴 내지는 물리적 결합을 의미하는 것이지 전혀 다른 것을 만들어내는, 즉 화학적 결합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로저 피들러는 컨버전스를 ‘상호진출’ 또는 ‘결혼’이라고 정의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방송과 통신의 컨버전스는 방송도 통신도 아닌 제3의 전혀 다른 서비스를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특성을 유지한 채 서로 만나 협력하는 서비스라는 의미다. 요즈음 한창 논란이 되고 있는 인터넷TV(IPTV)가 방송과 통신이 융합된 서비스라는 것은 IPTV의 근거 법률이 기존의 법이 아닌 새로운 융합법이어야 한다는 논리와 맞닿아 있다. 그런데 적어도 소비자 입장에서 볼 때 IPTV와 디지털케이블TV는 서비스 내용이 같을 뿐 아니라 양자의 주된 서비스는 방송이다. 즉 주문형비디오(VOD)서비스건 날씨ㆍ증권 등 새로운 정보이건 게임과 같은 엔터테인먼트이건 외국어 교육이건 알고 보면 그 내용은 결국 모두 방송인 것이다. 물론 IPTV를 통해서 통신서비스를 이용할 수는 있다. 하지만 통신서비스라고 할 수 있는 문자메시지나 메일을 보내기 위해 IPTV나 디지털케이블TV에 가입하려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IPTV가 방송과 통신이 결합된 서비스라 할지라도 방송이 주된 서비스이고 또한 디지털케이블TV와 같은 서비스를 소비자에게 제공한다면 양자가 동일한 법률에 의해 규율돼야 함은 자명한 이치이다. 소비자가 관심 있어 하고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방송과 통신의 융합이니, 결합이니 하는 언어유희가 아니라 IPTV가 소비자에게 제공하는 서비스가 기존 매체와 얼마나 차별화됐는지에 있다. 통신망을 쓰건 케이블망을 쓰건, 그 기술이 어떻게 되든간에 결국은 거실에서 TV를 봤을 때 무엇이 다르고 어떤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지에 소비자들은 관심을 갖는다. 지금은 IPTV서비스와 디지털케이블TV를 동일 서비스로 보고 양자가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있는 여건 마련에 이해당사자들이 동의함으로써 소비자로 하여금 최종 선택하도록 하는 지혜가 절실히 필요한 때다. 따라서 이제는 공정하게 경쟁하기 위한 ‘동일 서비스 동일 규제 원칙’에 입각한 ‘게임의 룰’을 정하는 일이 정책 관계자들의 몫으로 남아 있다. 이와 관련해 케이블TV 업계는 두 가지 조건을 내세우고 있다. 초고속인터넷ㆍ시내전화ㆍ시외전화ㆍ국제전화 등의 다양한 통신 분야 서비스에서 시장 지배적 사업자로 자리하고 있는 KT의 자회사 분리를 통한 IPTV의 진입과 이미 77개 권역으로 쪼개진 케이블TV와의 형평성에 맞는 지역권역 분할을 통한 서비스 실시다. KT가 주장하는 대로 유료방송시장 대비 33%의 시장점유율 규제는 사실상 진입 규제를 받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는 KT가 실제 서비스할 수 있는 권역이 33% 수준 미만에 그치고 있고 가입자 유치가 용이한 지역에만 서비스하는 이른바 ‘크림스키밍’도 방지할 수 없다는 점에서 합리적인 제안이다. 디지털케이블TV의 대체재인 IPTV의 진입의 논의로 케이블TV 업계가 기존의 시장을 내놓는 상황에서 이상 두 가지의 요구 조건이 무리한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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