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립무원(孤立無援)'. 이 사자성어에는 국내 신용카드업계가 처한 상황이 날것 그대로 함축돼 있다. 주변에 카드업계를 향한 성토가 넘쳐나지만 카드업계는 고양이 앞의 쥐처럼 납작 엎드려 있을 뿐이다.
하지만 카드업계는 모든 금융권을 통틀어 '뉴노멀(New Normalㆍ새로운 표준)'이라는 레테르를 붙일 만한 작업을 유일하게 진행하고 있는 곳이다. 지난해 12월22일부로 시행된 여신금융전문업법 개정안이 요체다. 개정안은 카드산업의 근본 자체를 뜯어고쳤다. '수익자 부담의 원칙'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카드 사용에 따른 혜택과 비용을 매칭시켰고 카드산업의 메커니즘은 재정립됐다.
연초부터 대형가맹점과 소비자들의 반발이 터져나온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수익자 부담의 원칙에 따라 대형가맹점은 비용부담이 늘었고 소비자는 혜택이 줄었다. 카드업계가 시도하고 있는 뉴노멀의 성패 여부는 바로 여기에 달렸다. 대형가맹점과 소비자의 반발을 최소화하고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됐던 수수료 체계를 하루빨리 안착시켜야 한다. 그래야 다음단계로의 발전도 꾀할 수 있다.
◇신(新)제도 안착을 위한 마찰적 과정=연초부터 카드업계를 둘러싸고 또 한번 논란이 불거졌지만 이는 새로운 체계 도입에 따른 과도기적 현상이라는 시각이 우세하다. 쉽게 말해 나쁜 습관을 고칠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시행착오일 뿐이라는 것이다.
대형가맹점과 카드사 간 수수료 협상이 좋은 예다. 지난해 여전법 시행안이 처음 공표됐을 때만 해도 대형가맹점이 수수료 인상안을 받아들일 것이라는 전망은 많지 않았다. 법적 소송이 불가피할 것이라는 시각이 우세했다. 하지만 최근 이동통신사와 손해보험사ㆍ항공사 등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대형가맹점이 인상안을 수용하면서 신(新)가맹점 수수료의 마지막 퍼즐이 채워졌다. 갈등은 예상보다 심하지 않았다.
문제는 이후다. 제도 안착을 위해서는 불법 리베이트 같은 부작용을 뿌리뽑기 위한 카드업계의 자정노력이 필수다. 대형가맹점과 카드업계는 그동안 수수료 보전 행위를 일삼아왔기에 더욱 그렇다. 금융당국이 신가맹점 수수료 체계 준수와 관련해 모니터링을 지속하는 것도 수면 아래서 혹시나 이뤄질 불법 리베이트를 예방하기 위한 조치다.
금융감독원의 한 관계자는 "제도가 안착하기 위해서는 도입 초기에 카드업계가 법의 취지를 제대로 준수해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상위 독식시대 끝…진검승부 위한 성장전략 필요=전문가들은 상위 카드사가 시장을 독식하던 시대는 끝났다고 진단한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20% 중반대의 시장점유율로 부동의 1위를 질주했던 신한카드는 어느덧 시장점유율 10%대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고 2위 자리는 KB국민카드를 제친 삼성카드의 몫이 됐다.
흥미로운 점은 카드사별로 고유의 특성이 강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찌감치 체크카드시장을 눈여겨보던 KB국민카드는 불과 1년 만에 NH농협카드와 신한카드를 물리치고 1등으로 올라섰다. 비씨카드와 하나SK카드는 모바일카드시장을 놓고 진검승부를 벌이고 있다. 재벌계열 카드사인 삼성ㆍ현대ㆍ롯데카드는 모그룹의 후광 효과를 등에 업고 자신만의 성(城)을 공고히 하고 있다.
하지만 카드사 간 자율경쟁을 확대시키고 질적 성장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제도 개선이 선행될 필요가 있다. 대표적인 것이 현행 포지티브 리스트 방식의 감독규정을 네거티브 방식으로 개정해 사업영역을 확대해주는 길이다. 카드사들은 현재도 감독규정 개정 없이도 진행할 수 있는 제휴 형태의 사업모델 개발에 주력하고 있지만 의미 있는 성장을 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민간 경제연구소의 한 연구원은 "금융산업이 발달한 선진국의 경우 수신 금융회사에 대한 업무범위 규제는 강하지만 여신업무만 수행하는 곳에는 규제를 거의 하지 않는다"며 "비용절감 외에 카드사가 먹고살 길을 좀 더 열어줘야 산업의 자생발전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부가서비스 축소보다는 내부 비용관리 우선=전문가들은 카드업계가 하나의 산업으로서 질적 업그레이드를 하려면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비용을 절감하는 노력이 선행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금리를 높게 산정하거나 일방적으로 부가서비스를 축소해 줄어든 수익을 보전하기보다는 내부의 불필요한 지출을 줄여 수익구조를 탄탄히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무이자할부 서비스 중단 논란은 카드업계의 인식이 아직 여기까지 미치지 못했다는 점을 보여줬다. 카드업계는 법에 따라 서비스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지만 소비자 불만을 최소화하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 약탈금리 수준인 할부수수료는 내버려둔 채 법 타령만 하다 보니 소비자 반발에 직면했다.
지난해 말 카드업계는 각 카드사별로 자구책을 마련해 금융당국에 제출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자구노력이 일회성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한 대형카드사 고위임원은 "경영학 이론 중에 '전략적 비용절감'이라는 것이 있는데 예산을 줄이는 게 아니라 비용관리를 통해 경영효율성을 높이자는 것"이라며 "이것이 지금 카드업계의 최대 현안"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