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 물든 전쟁은 수십 년 전에 끝났지만 전쟁의 상흔은 오랜 시간 남는다. 전쟁의 신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겨우 목숨을 부지한 이들의 삶은 폐허 그 자체인데 살아남은 자는 죽은 자에 대한 죄책감까지 짊어져야 할 몫으로 안고 있다. 베트남 전쟁을 소재로 한 '미스 사이공'은 참혹한 전쟁의 상처를 들춰내는 동시에 어루만지고 위로해 준다. 귀청이 찢어질 듯한 헬기의 프로펠러 소리와 함께 막이 오르는 미스 사이공은 1975년 사이공에 주둔하던 미군 부대가 철수하는 시대를 배경으로 한 미군과 베트남 여인의 러브스토리다.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을 소재로 뮤지컬 '미스 사이공'이 탄생한 만큼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과 비극적인 결말이라는 점에서 두 작품은 포개진다. '나비부인'은 1900년쯤 일본 항구도시 나가사키를 배경으로 전개되는 일본 게이샤와 미국 해군 장교와의 이야기로, 집안이 몰락하면서 게이샤가 된 일본 여자 초초상과 미국 장교 핑커튼이 비극의 주인공이다. 하지만 내내 수동적인 모습으로 일관하는 초초상과 달리 미스 사이공의 킴은 적극적이면서 헌신적인 모성애의 소유자다. 남편 크리스가 떠난 뒤 아들 탐을 키우기 위해 술집에서 몸을 팔면서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주는가 하면 다른 여인과 결혼한 크리스에게 아들을 보내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강한 모성애도 드러낸다. 미스 사이공에선 피해자와 가해자의 경계도 모호하다. 킴은 물론 베트남 여성을 창녀로 만든 술집 주인 엔지니어 역시 시대의 피해자라고 할 수 있다. 전쟁이 끝난 후 부이도이(Bui Doiㆍ먼지 같은 인생이라는 뜻으로 베트남전쟁 중 미국인과 베트남인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을 일컬음)를 도우며 새삼스럽게 도덕적인 모습을 보이는 미국 병사들도 가해자인 동시에 전쟁의 또 다른 피해자인 셈이다. 2010년판 미스 사이공에선 헬기 장면이 3D 영상으로 생생하게 처리됐고 2006년 초연 당시 문제로 지적됐던 가사 전달의 부자연스러움도 해소했다. 특히 새롭게 제작돼 이번에 국내에서 첫선을 보인 캐딜락 세트는 베트남전 당시 운행되던 실제 캐딜락과 같은 모델로 극중 인물들의 '아메리칸 드림'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소품이다. 오는 9월 12일까지 충무아트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