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여당 전당대회 주자 집중탐구] 비주류 좌장 김무성, 강한 추진력 '보스성향' 한계

대통령 직선제 개헌 이끌어

2012년 대선 승리 중추 역할


차기 집권여당의 지도부를 선출하는 7·14 전당대회가 1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새누리당의 차기 당 대표는 2016년 20대 총선 공천 심사 과정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등 커다란 권한을 갖게 된다. 이에 전대에 출마한 후보 중 '양강(兩强) 주자'로 꼽히는 서청원 의원과 김무성 의원의 성장과정 및 정치인생, 장단점을 집중적으로 살펴본다.

여의도 국회에서 '대장'이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정치인이 있다. 새누리당의 7·14 전당대회에 출마한 김무성(62) 의원이다. 그의 별명은 '무대'다. '김무성 대장'의 약칭이다.


그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9월20일 부산에서 4남1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해방 직후 전남방직과 신한제분을 운영하며 당대의 거부 반열에 올라선 부친(김용주) 덕분에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어릴 때부터 그는 항상 골목대장 노릇을 했다. '무대'라는 별명도 그때 붙었다. 그래도 부산·경남 지역 최고 명문이자 김영삼(YS) 전 대통령을 배출한 경남중학교에 들어갔다.

그는 중동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처음으로 '정치적 경험'을 하게 된다.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에 반대하기 위해 서울시내 고교 대표들과 연합시위를 이끈 것이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한양대 경영학과에 입학한 그는 졸업 후 곧장 사회생활에 뛰어들었다. 26세에 동해제강 상무 자리를 꿰찬 뒤 불과 6년 만에 삼동산업 대표이사직에 올랐다.

그러나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간접적으로 경험한 1980년부터 그는 정치에 뜻을 품기 시작했다. 결국 1983년 사업체와 주식 등을 정리하고 당시 야당 지도자였던 YS를 찾아갔다. 민주화추진협의회 창립 멤버로 참여하며 투쟁 끝에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YS와 김대중(DJ) 전 대통령과의 후보단일화 실패로 낙선했다. 절치부심하던 그는 1992년 14대 대선에서 YS를 당선시키는 데 성공하면서 정치적 체급을 키웠다.


YS 정부 청와대와 정부에서 요직을 거친 그가 여의도 국회에 첫발을 디딘 것은 1996년 15대 총선을 통해서다. 이후 재선·3선에 성공하며 성공 가도를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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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시련은 2008년에 찾아왔다. 이명박 정부 초기에 치러진 18대 총선에서 친박근혜계 좌장으로 낙인 찍혀 공천을 받지 못했다. 다행히 부산에서 '친박 돌풍'을 일으키며 무소속으로 당선됐다.

하지만 2010년은 그에게 정치인생의 또 다른 분수령이 됐다. 2010년 세종시 수정안을 두고 박근혜 대통령(당시 반대)과 다른 길을 갔기 때문이다.

결국 친박계가 주도한 19대 총선 공천심사 과정에서 물을 먹게 됐다.다만 18대 총선 때처럼 무소속 출마는 하지 않았다. 고심을 거듭한 끝에 '백의종군'을 선택했고 새누리당의 총선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당 내부에서는 "김무성 덕분에 최소 30석은 건졌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이후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 캠프의 총괄선대본부장으로 당에 귀환했다. 캠프 전체에 금주령을 내리고 야전침대를 깔았다. 대선 역시 승리로 이끈 그는 2013년 4·24 재보궐선거에서 부산 영도에 출마해 국회로 돌아왔다.

그에 대한 평은 다소 엇갈린다. 우선 강력한 추진력과 함께 야당과도 두루 통할 수 있다는 점이 장점으로 꼽힌다. 김 의원의 협상파트너였던 박지원 전 민주당 원내대표는 "그는 남의 말을 들을 줄 아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반면 그의 '보스 성향'이 한계로 작용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새누리당의 한 당직자는 "그는 YS로부터 정치를 배운 '상도동계'의 막내다. '3김(김대중·김영삼·김종필) 시대'의 보스 정치를 몸으로 체득한 마지막 정치인이라는 뜻이다. 전대에 출마하면서 변화·미래 등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 이미지를 지우기는 쉽지 않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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